대학에 다니던 시절, 집에서 학교까지 걸리는 시간은 1시간 40분이었다. 초중고 모두 15분 거리의 학교를 다녔기에 갑자기 늘어난 시간이 낯설었다. 무엇보다 집에 오가는 시간이 직장인 출퇴근 시간과 겹치는 바람에 무거운 전공책을 들고 선채로 버스나 지하철을 타야 했다. 한 학기가 지나고 나면 다크서클이 턱 밑까지 내려왔고 내 허리는 굽어 있었다. 결국 나는 1년 만에 학교 근처 고시원을 얻었다. 나의 한계치는 '1시간'이었다. 통근 시간이 1시간을 넘는 순간 나의 삶의 질은 급격히 떨어졌다.
그런 와중에 퇴근이 걸어서 3시간 걸렸다는 인물을 알게 됐다. 그는 매일같이 동대문 평화시장에서 도봉산까지 약 13km를 걸었다. 버스비가 없어서였다.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아침 8시부터 저녁 11시까지 하루 15시간의 고된 노동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돈이 없었다. 일당의 대부분은 하숙비에 썼고, 나머지 돈은 밥을 굶는 어린 시다(일하는 사람의 옆에서 그 일을 거들어 주는 사람)들에게 풀빵을 사주는 데 썼기 때문이다. 3시간의 퇴근길을 걷는 건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었지만 그의 의지이자 '선택'이기도 했다. 그는 바로 1948년생 전태일이다. 신기하게도 내가 전태일 열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그의 분신도 노동 운동도 아닌 '걸어서 3시간 퇴근길'이었다.
ⓒ 우리 모두 전태일 문화제: 평화시장 앞 전태일 다리부터 도봉구 쌍문동까지 약 13km
전태일은 어떤 마음으로 3시간을 걸었을까?
2020년 11월 13일은 전태일 열사 50주기였다. 50년 전 그는 자신의 손에 든 근로기준법전과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이며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라고 외쳤다. 그의 희생은 노동운동의 불씨가 되었다. 내가 전태일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이게 전부였다. 딱히 노동운동에 관심이 없었던 나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소리에 섞여 그의 이름을 들었을 뿐이다. 하지만 우연히 친구가 꺼낸 전태일의 이야기 덕분에 나는 전태일 기념관을 방문하고 50주기 행사의 일환이었던 '전태일 귀갓길 야행'에 참가 신청을 했다. 3시간이란 시간이 만만치 않아 보였다. 하지만 매일 그 길을 걸었던 전태일을 생각하며 하루쯤이야 라고 의지를 다졌다.
'전태일 귀갓길 야행'은 50주기 일주일 전 11월 7일 토요일에 진행됐다.(코로나 격상 전이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모였다. 처음은 마치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들뜬 분위기였다. 하지만 1시간이 지나고, 2시간이 지날 즈음부터는 말소리가 하나 둘 없어졌다. 어느새 지나가는 차 소리와 사람들의 숨소리만이 배경을 장식했다. 나는 무릎과 허벅지 뒤쪽이 저리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3시간을 연달아 걸었던 적이 군대 행군을 제외하고는 없었다. 처음에 들었던 온갖 잡생각은 차분히 정리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당시 이 길을 걸었던 전태일을 떠올렸다.
그는 3시간 동안 어떤 생각을 하며 밤길을 걸었을까? 많은 사람과 같이 걷는 그리고 불빛이 반짝이는 밤거리를 걷는 나와는 달리 그는 홀로 어두운 밤거리를 걸었을 것이다. 혹시나 어린 시공들에게 풀빵을 사준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을까? 무섭지는 않았을까? 외롭지는 않았을까? 나라면 매일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전태일의 심정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고 싶었지만 그가 어떤 생각을 하며 걸었을지는 마음대로 짐작할 뿐이다. 아마 당시 경찰도 그랬을 것이다. 당시에는 통금이 있었기에 전태일은 귀가 도중에 자주 경찰서에 연행되었다. 하지만 이런 일이 반복되자 경찰도 나중에는 그를 그냥 집으로 보내주었다고 한다.
전태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이 있다. 분신 사건이 없었어도 그는 충분히 훌륭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다. 1964년 견습공의 일당은 50원이었다. 당시 커피 한 잔은 30원이었고 설렁탕 한 그릇은 60원이었다. 일당으로 설렁탕 한 그릇을 먹기 힘든 말도 안 되는 상황. 게다가 하루 하숙비는 120원이었기에 전태일은 아침에 여관 손님의 구두를 닦으며 생활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돈이 없어 밥을 먹지 못하고 엎드려 배고픔을 참고 있는 어린 시공들을 위해 밥과 풀빵을 사주었던 것이다.
KBS 1TV <역사저널 그날> 283회에는 전태일과 관련한 다른 에피소드가 하나 소개된다. 맛집 소개 프로그램을 맡은 PD가 평화시장 근처의 감자탕 집을 취재하러 갔다가 전태일에 대해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주인 할머니는 전태일이 우리 집의 단골이었다며 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전태일은 항상 데리고 온 여공들만 밥을 사주고 자신은 밥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본 주인 할머니는 나중에 그에게 말한다.
"내가 너한테 돈 받을까 봐 안 먹었냐? 바보처럼..."
KBS 1TV <역사저널 그날> 283회 [인간선언 우리는 재봉틀이 아니다], 전태일에 대해 알고 싶다면 이 편을 보는 것을 추천한다
그러자 전태일이 주인 할머니에게 대답했다고 한다.
"아이들한테는 먹었다 그랬거든요..."
자신의 처지가 어려울수록 남의 어려움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그 사람의 처지를 그의 노력의 대가로만 바라보는 시선도 많다. 이런 세상에서 마음을 다치지 않고 일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전태일이 떠나고 50년이 흘렀다. 50주년이 다가오자 언론은 그리 달라지지 않은 세상에 대해 특집 기사를 쏟아냈다. 산업 현장의 공장 노동자들, 택배 기사, 웹툰 지망생, 독립 PD 등. 하지만 인간적인 대접, 노동이 존중받는 세상이란 표현은 이제 클리셰처럼 들리기도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너무 오래 실현되지 않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이러한 현실을 감안하면 이제야 전태일에 대해 찾아보고 글을 쓰는 것이 죄스러운 마음도 있다.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전에 쓰인 한자를 보면서 '대학생 친구가 있었다면...'라고 말했다고 한다. 지금 시대에 전태일들 곁에는 그러한 친구가 있을까? 어떠한 사람들이 그 곁을 지키고 있을까? 곁을 지키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나면 외롭고 쓸쓸했을지도 모르는 전태일의 귀갓길은 조금 달라질지도 모른다. 내일에 대한 걱정보다도 더 나은 내일에 대한 희망을 머리에 그리며 더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나 역시 전태일들의 곁에 서 있으려 한다. 사실 나 역시 전태일이다. 그리고 너는 나이고 너는 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