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게 삶이라지만 때로는 무언가 없어지고 생기는 일이 낭패로 이어진다.
특히 그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들켰을 때에는!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의 《그림자를 판 사나이》에서는 악마에게 그림자를 판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부자가 되는 것을 조건으로 평소에 있으나 마나 하다고 생각한 그림자를 악마에게 준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그에게 그림자가 없다는 것을 발견한 사람들은 사나이를 악마로 몰아세우고 그는 결국 도시를 떠나게 된다. 쫓겨나면서 그는 분명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아니, 대체 그림자 그까짓 게 뭐라고!”
그림자 하나로 그는 순식간에 ‘비정상’이 된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그림자가 없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가 속한 사회가 그림자가 없는 것을 문제 삼아 비정상이라는 딱지를 붙였다는 사실이다.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건 어떠한 객관적 기준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시대와 상황의 주관적 맥락이다. 반대로 만약 그림자가 없는 사람을 악마가 아닌 ‘신’이라고 생각하는 사회라면 어땠을까? 언뜻 좋을 듯 하나 이 역시 그림자가 없는 사람을 보통과는 다른 존재로 분류하는 것은 같다. 또한, 신으로 취급받는 삶 역시 피곤할 가능성이 높다. 실제 그는 신이 아니라 단지 그림자가 없는 사람일 뿐이니까. 신의 역할을 하지 못할 그에게는 재앙이 예고되어 있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분류하는 것을 그만둘 수는 없다. 우리의 사고는 범주화를 기본으로 이루어진다. 범주화를 하지 않는 것도 불가능하지만 범주화를 할 수 없다면 우리는 이 복잡한 세상을 이해하기가 굉장히 힘들어질 것이다. 중요한 것은 분류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폭력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그림자가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은 어쩔 수 없으나 그를 두고 비정상이란 단어를 붙이지 않는 것, 그리고 그림자가 없는 사나이를 내쫓지 않는 것은 어찌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림자가 없어진 것과는 반대로, 패닉의 《뿔》이란 노래에는 어느 날 아침, 머리 뒤에 뿔이 생긴 청년의 이야기가 나온다. 뿔이 계속 자라자 청년의 고민한다.
근심찬 얼굴로 주위에 알리려다가
이상한 눈으로 놀려댈걸 뻔히 알고 관뒀네
청년의 고민은 뿔 자체가 아니라 사회의 시선이다. 오히려 청년은 나중에는 자신의 뿔이 나만이 간직한 비밀이라며 예쁜 뿔을 소중히 여긴다. 하지만 두려운 마음이 남았는지 청년은 모자를 쓰고 출근하고 직장 동료들은 한 마디씩 건넨다. “거 모자 한 번 어울리네”
모자는 일종의 타협인 셈이다. 뿔을 비정상이라고 분류하는 세상과 그런 세상에서 나 자신을 긍정하기 위한 시도 사이의 타협. “뿔 그까짓 게 뭐라고!” 모자 대신 뿔이란 단어가 들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세상이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는 측면에서 노래는 쓸데없이(?) 현실적이다.
나에게도 살면서 여러 뿔이 자라났다. 그중 하나는 '나이'다. 뒤늦게 PD를 꿈꾸고 준비하는 과정도 길어지는 바람에 나이는 점점 자라났고 그 나이에 대해 사회는 의문을 가졌다. 그러다 보니 나이에 대해 변명 아닌 변명을 하게 된 경우가 많았다. 그 과정에서 "크게 기대 말라"라는 현실적 조언을 듣기도 한다. 그나마 나이는 이렇게 대놓고 징징댈 수 있는 종류의 것이다. 어차피 가려지지 않으니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들이든 "그까짓 나이가 뭐라고!"라고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체한다. 진짜 나의 예쁜 뿔들은 공개적인 자리에서는 모자 속에 고이 모셔 놓는다. 누구에게든 그런 뿔이 있을 것이다.
그림자가 없는 사람에게 무미건조하게 “그림자가 없구먼”, 뿔이 난 청년에게 “거 뿔 한번 멋지네!”라고 평범하게 말을 건넬 수 있는 세상이면 좋겠다. 한쪽 팔이 없어도, 성 정체성이 달라도 비정상이란 단어로 분류되지 않는 세상. 그런 세상이 너무 이상적이라면 뿔이 난 사람들에게 모자라도 쓸 수 있게 하면 좋겠다. 때로는 모자가 벗겨져서 뿔이 드러나도 모른 체 해달라. 자신만의 예쁜 뿔들을, 그 비밀을 자신이 원하는 사람에게만 말할 수 있도록. 그런 세상에서 비정상이라는 분류는 힘을 잃을지도 모른다. 신도 아닌, 악마도 아닌 그저 이런저런 사람이 있을 뿐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