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 > 라나의 편지
코로나 4단계가 격상으로 나는 여름방학 아닌 여름방학을 아이들과 보냈네요. 직장 어린이집이어서 어린이집이 아예 휴원 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이들을 자발적으로 함께 4주간 시간을 보냈어요. 아이들과 함께 있으니까 아이들에게 맞추어져 내 개인적인 시간이 줄어들었죠. 하지만 그렇게 줄어진 시간에서도 나는 어떻게든 내 시간을 만들고 싶어서 이른 새벽에 눈을 떠서 하루, 하루 보냈던 거 같아요. 엄마가 되어서 내가 뼈저리게 몸소 배운 것은, 시간의 소중함이라 생각해요. 늘 내 시간의 갈급함이 가져다 큰 가르침이죠.
우리 독서 모임의 책으로 성호가 추천한 이길보라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를 처음 읽게 되었을 때 그저 부럽고 대리만족을 하며 읽었어요. 연고가 하나도 없는 유럽의 한 국가인 '네덜란드'로 자신의 꿈을 위해 유학을 떠난 다큐 감독의 이야기. 누군가를 생각할 필요 없이 오롯이 자신만을 생각하고 떠난 거잖아요. 그런데 한편으로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내가 다시 이길보라 감독의 나이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본연의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그리고 정작 그 소리를 들었다 한들 떠날 수 있을까?' 싶더라고요. 이길보라 감독은 고1 때 학교 문밖을 나와 아시아 8개국 배낭여행을 떠났고, 여행을 돌아와서도 학교로 다시 돌아가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글쓰기, 영상 제작 등 자신만의 학습을 해나갔었잖아요. 늘 10대부터 자신의 내면에서 나는 소리에 충실했던 사람이었다는 게 느껴져요. 그에 비해 나란 사람은? 10대 시절에는 부모님, 학교 선생님의 기대? 20대 시절에는 세상의 기준에 맞추는데 더 충실했던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30대 중반을 넘어가는 지금 시점에서도 과연 내가 추구하고 있는 것들은 과연 내 목소리를 듣고 하는 것인지, 그저 내 목소리로 착각하는 세상의 욕망들은 아닌지 자문하게 되는 듯해요.
이길보라 감독이 네덜란드 유학 생활에서 타인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문화 특징으로 그곳에서 자신의 삶이 단순해졌고, 그러다 보니 필요한 곳에 시간과 마음을 쓸 수 있게 되었다는 부분이 참 인상 깊었어요. 타인의 가치판단보다 나의 가치판단이 우선시되다 보니 그 모든 시간을 자신을 위한 시간이 될 수 있었다는 말에 정말 밑줄을 긋고 있었어요.
“요새 유행하는 거라서, 다른 사람들 다 갖고 있으니까 등의 이유로 사는 일은 사라졌다. 타인의 가치판단보다 나의 가치판단이 우선이 되었다. 그러자 그 모든 시간들이 나를 위한 시간이 되었다. 내가 입고 싶은 대로 입고하고 싶은 대로 해도 나는 '나'일 수 있었다. 내 옆을 스쳐 지나가는 타인 역시 자신만의 색깔을 지닌 '그 사람'이 되었다. 삶이 조금 더 가벼워졌다.”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 > 「내가 입고 싶은 대로, 내가 먹고 싶은 대로 」 중에서
이 밑줄 그은 부분을 다시 음미하는 순간, 우리나라가 아닌 타국으로 가서 그저 내 목소리에만 집중해서 살아보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히기도 했어요. 만약 그렇다면 나는 나의 어떤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요? 해보지 않아서 알 수가 없네요. 난 참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는데 어느 순간, 20대 중반 무렵 문학 작품들을 펼치기가 어려운 나를 발견한 적이 있어요. 책 읽기조차 어떠한 목적이 투영되지 않는다면 잘 읽히지 않는 상태가 되어 버린 거죠. 그저 이야기가 좋아서 책을 펼치던 나는 왜 사라져 버린 걸까요? 이야기를 좋아하던 내 모습이 본연의 '나'와 더 가까울 것 같아 그 시절이 문득 그리워져요. 지금 내 모습은 뭔가 세상의 좋은 것들은 죄다 갖다 붙이고 싶어서 치렁치렁 이것저것들을 달고 있는 모습 같아요. 텃밭을 일구며 토마토를 키우면서 알게 된 삶의 지혜가 있어요. 달고 맛난 토마토를 얻기 위해 곁가지들은 제거해줘야 한다는 거요. 과연 '나'란 사람에 달려진 곁가지들을 다 쳐내고 남으면 무엇이 열매로 맺게 될까요?
나는 이길보라 감독처럼 홀연히 내가 있는 이곳을 꿈을 위해 떠날 수 없지만 대신 지금 사는 세상과 조금 단절해보려고 합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 기준을 쫓는 대신 내 마음 안의 세상을 돌보는 시간에 더욱 집중해보겠다고 다짐해봅니다. 처음부터 쉽지는 않을 거 같아요. 하지만 이렇게 여러분과 글을 함께 쓰고 책으로 엮어보겠다는 거 자체가 나의 목소리에 조금 더 집중한 결과라고 생각해요. 분명 예전의 나였으면 생각만 하고 다른 일의 우선순위에 밀려 이 일도 말만 하고 흐지부지하고 말았을 건데 나는 분명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으니까요. 늘 타인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자 애썼던 삶 대신 나에게 좋은 사람으로 하루하루 살고 싶어요. 책 제목처럼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 앞으로의 제 인생이 더 기대됩니다. 이만 편지를 줄이겠습니다. 편안한 저녁 시간 되세요. 저는 이만 미라클 모닝을 위해 잠자리에 들려고요. (여러분의 눈총이 느껴집니다. 세상의 기준을 안 쫓겠다더니?! 워워, 여러분들 사람은 쉽게 고쳐 쓰는 게 아니랍디다. 서서히 고쳐 볼게요.)굿나잇~
2021년 8월 23일 막바지 여름 장대비가 온 다음 날
세상은 아웃 오브 안중, 행복한 이기주의자를 꿈꾸는 여러분의 독서 벗 라나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