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라나의 편지
데미안으로 쓴 성호의 첫 편지 잘 보았어요. 그 편지를 보면서 나 역시도 싱클레어 같은 느낌을 내 엄마에게서 느꼈던 적을 떠올랐어요. 예전에는 그저 부모님, 엄마의 말이 다 세상의 옳은 가르침과도 같았는데, 마치 나 혼자서 스스로 큰 듯 엄마는 세상을 너무 모른다고 엄마를 가르치려고 들 때가 있으니 말이에요.
그렇게 엄마 말을 잘 따르던 범생이 딸에서 혼자 잘난 듯 가르치려고 드는 딸의 근황은 어떠할까요? 엄마 말고 맹신할 사람들을 찾아 여기저기를 서성이고 있어요. 30대 중반 나이면 누군가는 전문가가 되어서 자신의 분야를 가르치고 조언을 하기도 하는 나이인데, 나는 여전히 나의 역할, 인생 방향성에 관해 방황하고 있어요. 누군가의 말을 잘 경청할 줄 아는 나의 장점은 이런 방황하는 시기에 더욱 위력을 발휘해 여러 사람의 말을 듣고 매일 흔들리는 기분이 들어요.
어린이 도서연구회 사람들과 어린이 동화책에 열을 올리다 보면 나는 어린이 동화를 위해 글을 쓰고 공부하는 사람이고 싶어요. 또 아이들의 교육에 정성 가득한 엄마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우리 아이들을 잘 케어하는 엄마 사람이 되고 싶기도 하고요. 어제는 누군가 추천해 준 부동산 강의를 듣고는 ‘부동산으로 부를 이룩해야겠다.’ 또 남편이 내년에 대학원 진학을 권유받고는 앞에서 전혀 언급하지 않았던 전공을 공부할 생각에 잠긴답니다. 그런데 당장 오늘 메일로는 프리랜서로 하고 있는 출판사 편집 원고가 도착했네요. 이런 나를 어쩌면 좋죠?
누군가의 이야기에 자꾸만 팔랑이는 나에게 <데미안>을 펼쳤을 때 데미안이 내게 시크릿을 알려주는 기분이 들었어요. 싱클레어가 크로머에게 당하고 있는 순간, 불현듯 싱클레어에게 나타난 데미안은 크로머에게서 그를 구출하지요. 데미안은 어떻게 그 순간 나타났느냐고 묻고 싶지만 이야기할 수 없고 수업 시간 신부님의 이야기를 꺼내며 어떻게 상대방을 자신의 의지대로 조정하냐는 식으로 물어보지요. 하지만 그것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상대방을 잘 보면 잘 알 수 있게 된다고 말하죠. 그러다가 급기야 답답해진 싱클레어는 ‘자유의지’에 관해 되물어봅니다.
“하지만 의지는 어떻게 되는 거지? 자유 의지란 없다고 말했잖아. 그런데 다시 오직 자기 의자만 확고하게 무언가에 쏟으면 된다고 말했지, 그러면 자기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고, 그건 앞뒤가 맞지 않잖아! 내가 내 의지의 주인이 아니라면 내 의지를 마음대로 이런저런 데로 향하게 할 수 도 없는 것 아니야.”
이 싱클레어 물음에 답하는 데미안의 답변은 세상을 달관한 사람 같이 시크릿을 말해줘요. 나방에 빗대어서요. 그러면서 우리 인간의 삶과 연결시키기까지 하지요.
“예를 들면 그런 나방이 자신의 뜻을 별이나 그 비슷한 곳까지 향하게 하려 했다면 그건 이룰 수 없는 일이겠지. 다만 나방은 그런 시도는 안 해. 나방은 자기에게 뜻과 가치가 있는 것, 자기가 필요로 하는 것, 자기가 꼭 가져야만 하는 것, 그것만 찾는 거야.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믿을 수 없는 일도 이루어지지.(중략) 우리도 얼마만큼은 정말 좁은 테두리에 매여 있어서 그걸 벗어날 수 없어. 상상 같은 건 해 볼 수 있지. 이런저런 상상의 날개를 펼 수는 있겠지, 북극에 꼭 가고 싶다든가 하는 것을. 그러나 그걸 수행하거나 충분히 강하게 원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소망이 나 자신의 마음속에 온전히 들어 있을 때, 내 본질이 정말로 완전히 그것으로 채워져 있을 때뿐이야. 그런 경우라면, 너의 내면에서 명령하는 무언가를 네가 해 보기만 하면 그럴 때는 좋은 말에 마구를 매듯 네 온 의지를 팽팽히 펼 수 있어.”
누군가의 목소리에 흔들려서 나는 이런 말을 했던 데미안이 나와 같은 이야기를 싱클레어가 했다면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요?
“도대체 너의 본질은 어디 있는 거야? 싱클레어 네가 고민하는 것들에는 네가 보이지 않아. 넌 누구지? 네 본질은 뭐지? 넌 채워진 것 없는 텅 빈 깡통 같아.”
우리가 데미안 이야기를 나눴을 때도 난 이 부분이 강렬히 다가왔다고 했는데 지금도 난 변한 게 없네요. 그때 성호가 썼다던 메모를 내가 간직하고 있어요. 나는 싱클레어고, 성호가 데미안인 걸까요? 성호가 나에게 지혜를 주네요.
내 마음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지혜가 있다.
잠시 숨을 고르고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
어떻게 하길 원하는지 생각해보면,
내게서 꼭 필요한 언어가 생겨 난다.
그러니 다른 사람에게 묻지 말자.
나에게 묻자.
두려워하지 말자. 나에게 묻자.
오늘 우연히 들었던 유튜브 한 작가 말이 떠오르네요. 우리가 사춘기 때 방황은 막 교과서에도 쓰여있듯 마구 해도 되면서 중년이 접어드는 나이가 될 때 방황은 잘못된 것으로 본다고요. 하지만 이 나이 때 방황은 당연한 것이라고요. 사춘기 때 방황은 문제아가 되는 것이라 여겼던 내가 지금에서야 제대로 나다운 방황하는 거라고 여기겠어요. 한동안 내 글에서는 ‘나를 찾는 여정’이 계속 이어질 것 같네요. 그때마다 여러분이 나의 데미안이 되어 주길 바라며 이만 줄입니다.
2021.09.12.
서늘한 가을바람이 반가운 어느 저녁
여러분의 싱클레어 라나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