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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잔 Oct 24. 2021

데미안에서 두시언해까지

<데미안> 혜정의 편지

“Der Vogel kämpft sich aus dem Ei.”     

세대마다 역사를 새로 써야 한다는 말이 있다. (중략)
그러나 새로 작성할 것은 비단 역사만이 아니다. 번역 문학도 마찬가지다. 세대마다 문학의 고전은 새로 번역되어야 한다. <두시언해>는 조선조 번역 문학의 빛나는 성과이지만 우리에게는 우리 시대의 두시 번역이 필요하다. (중략)
<두시언해>가 단순한 번역 문학이 아니고 당당한 우리의 문학 고전이듯이 우리말로 옮겨 놓은 모든 번역 문학은 사실상 우리 문학이다. 우리는 여기에 우리 문학을 자임하며 오늘의 독자들을 향하여 엄선하여 번역한 문학 고전을 선보인다. (중략) 
-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편집위원 김우창, 유종호, 정명환, 안삼환     

하이, 나의 자매들!

오늘 9월 19일 일요일, 추석 연휴의 둘째 날이야. 

시댁에 들르기 전에 춘천에 일할 겸 바람 쐴 겸 들러야 하는데, 그럼 아침 여덟 시에는 남편과 아이들을 깨워야 하는데 그대들에게 말을 건다.     

102년 전 베를린에서 날아온 <데미안>을 앞에 놓고 이제부터 난 잠시 옆길로 샐 거야.

왜냐고?

<데미안>을 한 번도 안 읽어본 이는 있어도 “알은 세계다”로 시작하는 대표 문장을 모르는 이들은 아마 없을 테니까.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 더 스토리     
“새는 알을 깨고 나오려고 힘겹게 싸운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도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 열린책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 - 민음사     

우리 셋은 각자 다른 출판사의 책을 읽었고 대표 문장을 비교하면서 저마다 결이 다른 데미안을 만났어.

성호가 정리해줬듯 직설적이고 단호한 데미안도 있었고 섬세하게 설득하려는 데미안도 있었지.     

새와 알 그리고 세계.


고등학교 때 읽었을 때도 삼십 년 가까이 시간이 흐른 지금도 어쩜 이리 어렵니?

아직 스무 살 무렵의 쪼그만 녀석이 어찌나 심오한지 정이 안 간다.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이야기한 아브락사스는 선과 악을 동시에 지닌 신이라는데, 김성훈이라는 수필가는 “선과 악을 다 지녔다기보다는 완전한 선과 선을 흐릿하게 하는 어리석음을 함께 지니고 있다고 해야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라고 평을 했어.

불안전함과 어리석음이야말로 악의 근원이라면서 말이야.

덧붙여 데미안(Demian)의 이름은 데몬(demon)에서 유래한 뜻으로 ‘악마에 홀린 것’이라는 의미를 담았다는 해석도 소개해.     

때로는 신비롭지만 때로는 위험한 데미안, 그의 입을 빌어 헤르만 헤세가 하려던 말은 뭐였을까?

그래서 원문을 찾아봤지.


“Der Vogel kämpft sich aus dem Ei.”라는데 

파파고 번역기에서는 “새가 알에서 싸운다.”라고 풀이해.

시대와 공간을 거스를 수 있다면 1917년 스위스에서의 헤르만 헤세는 어떤 출판사의 번역을 가장 마음에 들어 할까.      


이미 책에서 멀리멀리 떠나간 나의 궁금증은 엉뚱한 곳에 닻을 내렸다.

<올리버 트위스트> 책 뒤표지 날개에 적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편집위원들의 셀프 추천사에 말이야.

우리말로 옮겨 놓은 모든 번역 문학이 우리 문학이라니,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그대로 설득되고 말았어.     


그리고 나의 호기심은 그들이 소개한 <두시언해>로 날아갔지.

그대들은 <두시언해>를 아는가?     

난 몰라서 네이버에게 물어봤다.

“중국 당(唐) 나라 두보(杜甫)의 시 전편을 52부(部)로 분류하여 한글로 번역한 시집(詩集)”이라고 대답해준던데 그냥 번역 시집이 아냐.

국문학사상 최초의 한글 번역 시집이라는 사실!!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원명은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야. 

시성이라 불리는 두보는 시선 이백과 동시대를 살았대.

게다가 11살 나이 차이를 뛰어넘는 친구였다지. 

참고로 이태백이 밝은 달아 할 때 나오는 이백의 형이라네.     

<두시언해>는 두보의 시 1,647편 전부와 다른 사람의 시 16편에 주석을 달고 풀이한 책인데 초간본과 중간본이 있대.

초간 <두시언해>는 1443년(세종 25) 4월에 착수, 38년 만인 1481년(성종 12)에 비로소 간행됐어.

승려 의침(義砧)을 비롯하여 유윤겸(柳允謙)·유휴복(柳休復)·조위(曺偉) 등 당시 두시(杜詩)에 통달한 사람이라면 신분과 상관없이 참여한 대대적인 번역 사업이었다지.     

전 25권, 활자본으로 간행되었지만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일부가 소실되어 중간 <두시언해>가 간행되었지. 

1632년(인조 10) 3월에 경상감사 오숙(吳imagefont)이 대구부사 김상복(金尙宓)에게 시켜 관하 각 읍에서 목판본 전 25권으로 분간(分刊)하게 했다는데 초간본과 150여 년의 연대차가 있어 초기의 한글 음운 변천과정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었대.     

그래서 또다시 나의 호기심은 <두시언해> 속 두보의 작품이 궁금해졌어.


모든 작품이 주옥같지만 <등고>라는 작품을 소개할게.         

핫.. 어때?

분명히 훈민정음으로 쓰였으나 이 또한 해석불가인 외계어라 풀이를 찾아보았지.     

바람이 빠르며 하늘이 높고 원숭이의 휘파람이 슬프니

물가가 맑고 모래 흰 곳에 새가 날아 돌아오는구나.


끝없이 지는 나뭇잎은 쓸쓸히 떨어지고
다함이 없는 긴 강은 잇달아 오는구나.
만 리에 가을을 슬퍼하여 늘 나그네가 되니
한평생 많은 병에 혼자 대에 오르도다.
온갖 고통에 서리 같은 귀밑머리가 많음을 심히 슬퍼하니
늙고 보기 흉하게 되매 탁주잔을 새로 멈추었노라.     


‘등고’는 음력 9월 9일로 중앙절의 중국 풍습이래.

조상께 차례를 지내고 높은 곳에 오르는 일을 말함인데, 지금의 등산과는 그 의미가 사뭇 다르더라.

산의 정기를 쐬어 몸과 마음을 단련하고 호연지기를 기르는 수양의 수단이어서 옛 문인과 묵객들이 경치 좋은 곳에 올라 시문을 짓고 화랑은 수련을 했다지.     

나의 네이버 선생은 이 작품을 두고 “이 무렵의 지은이는 오랫동안의 피난과 생활고로 갖은 병마에 시달리게 되었고, 그렇게 좋아하던 술마저 끊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가을을 맞이하여 우수수 떨어지는 나뭇잎을 바라보며, 인생의 비애와 자신의 불우함에 대한 애끓는 심정을 진솔하게 표현하였다.”라고 했어.

천재 시인의 인생무상이 그대로 전해졌지.     

한데 말이야..

두보와 두시언해에 대한 자료를 찾다보니 한학자이자 전직 고교 국어 교사인 손종섭 선생이란 분의 번역을 만났어.

<이두시신평(李杜詩新評:이백과 두보 시의 새로운 평석)>이라는 저서에서 <등고>의 마지막 연(聯)인 ‘요도신정탁주배(요倒新停濁酒杯)’를 ‘아, 영락한 몸! 될 대로 돼라. 탁주 잔을 새로이 손에 들었네’로 번역하셨대.     

대다수 번역은 앞서 풀이한 것처럼 ‘늙고 쇠약해져 이제는 탁주 잔마저 내려놓았네’라고 풀이하며 ‘정배(停杯)’를 ‘술을 끊는 것’으로 해석하거든.

하지만 손종섭 선생은 ‘정배(停杯)’를 음주 동작의 여러 단계 중 하나로서,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기 전에 손에 멈추어 들고 잠시 뜸을 들이는 과정이라고 하셨어.     

다도처럼 옛날에는 술 먹는 동작도 격식이 있었나 봐.

‘거배(擧杯)’→‘정배(停杯)’→‘함배(銜杯)’→‘경배(傾杯)’→‘건배(乾杯)’ 순으로, 잔을 들고 잠시 멈추고 입에 머금고 목을 젖히고 잔을 말끔히 비워내는 것이지.

결국 ‘정배(停杯)’는 결국 술을 끊는 것이 아니라 술을 먹는 단계의 일부분이라며 중국과 우리나라의 여러 한시 사례를 들어 고증하셨대. 여덟 행의 한시도 이처럼 다양하게 풀이되는데 소설 한 권은 오직 할까.


민음사 블로그에 소개된 글을 빌자면, 국내에 소개된 <데미안>은 40여 종이나 된다고 하네.

그중에서도 가장 원문에 가까운 번역을 했다고 자부하니 자사의 <데미안>을 권한다면서.

그대들은 어떤 <데미안>이 가장 좋았을까?


데미안에서 나의 두시언해까지 뻗쳤던 어느 날
나의 충만한 호기심에 대한 이해를 바라며 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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