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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잔 Oct 24. 2021

그 코다 청소년이 철로에 몸을 던진 이유를 이제 알겠어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 혜정의 편지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 「나의 모어는 수화언어」중에서

너희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코다(CODA, Children of Deaf Adults), 농인 부모 아래서 태어난 자녀를 일컫는 이 단어는 농사회와 청사회를 오가며 자란 나에게 빼놓을 수 없는 정체성이 되었다.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 「나의 모어는 수화언어」중에서

   

코다라는 낱말을 처음 알게 된 건 재작년이었어. 대전역 근처에 손소리복지관이라는 청각·언어장애인 전문복지기관이 있거든. 대전평생교육진흥원의 지원을 받아 학습 프로그램을 운영한다기에 시민기자로서 문을 두드렸지. 처음엔 손소리복지관이 어떤 기관인지 또 어떤 학습 프로그램을 운영하는지 간단히 취재할 요량으로 찾아갔는데 열 배는 더 큰 묵직함을 안고 돌아오게 되었지.  

“손소리복지관은 2015년에 문을 연 농아인 전문복지기관입니다.” 사회복지사의 안내를 듣고 내 귀를 의심했어. ‘농아(聾啞)’는 ‘귀머거리’와 ‘벙어리’를 뜻하는 한자말이라 이들을 비하하는 잘못된 표현이라 알고 있었거든. 그래서 ‘청각장애인’, ‘언어장애인’이라고 지칭해야 배려하고 존중하는 것이라 생각했지.     

하지만 이어지는 설명을 듣고서야 내가 얼마나 무지한지 알게 됐어. ‘장애’라는 낱말이 완전하지 못하거나 부족하다는 꼬리표가 된다는 걸, 그래서 듣지 못하거나 말하지 못하는 이들은 스스로를 ‘농아인’ 혹은 ‘농인’으로 부른다는 걸 말이야. 그때까지 나의 세상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으로 나뉘었는데 이들의 세상은 어떻게 나뉘는지 아니? ‘농아인’ 혹은 ‘농인’ 그리고 들을 수 있는 ‘청인(聽人)’이래.     


사람들은 혀를 끌끌 찼다. 부모는 자신을 ‘농인’이라고,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는 수화언어라고 자랑스럽게 말했지만, 세상 사람들에게 그건 어딘가가 결여되었다는 의미였다. ‘장애인’으로 사는 것도 그랬지만 ‘장애인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 또한 쉽지 않았다. 언제나 차별과 동정의 시선이 뒤따랐다. -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 「나의 모어는 수화언어」중에서

대전에는 다섯 개 구마다 장애인복지센터가 있는데 농아인 전문복지기관이 왜 필요할까? “태어날 때부터 듣지 못한다면 글 배우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듣지 못하기 때문에 소리 내기가 힘들고 소리 내지 못하기 때문에 읽고 쓰는 것도 배우기 어렵죠.” 하지만 드라마 <아저씨> 속 할머니나 <상속자들>의 엄마는 가족 이외의 사람들과는 필담으로 의사소통을 하잖아. 조금만 노력하면 읽기와 쓰기 모두 되는 게 아닐까 싶었는데 사회복지사가 늘 들었던 질문이라며 웃더라. “미디어는 우리가 농아인을 제대로 이해하기도 전에 잘못된 편견을 심어줍니다. 농아인이 수어에 필담까지 자유자재로 하는 건 마치 우리가 한국어에 영어까지 유창하게 하는 것과 같거든요.”      


그래서 손소리복지관에서는 <금도끼와 은도끼>,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콩쥐팥쥐> 같은 옛이야기를 수어 영상물로 제작하고 대여하고 있대. 우리가 유년시절에 귀가 닳도록 들었던 옛이야기를 누군가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모를 수 있다는 걸 상상해 봤니? 나라면.. 너무 슬플 것 같아.    

 

사람들은 겉보기에 멀쩡해 보이는 부모에게 저기요, 하고 말을 걸었다. 그러나 청인의 입장에서 ‘들은 척도 하지 않는’ 부모의 등을 마주하면 미간을 찌푸렸다. 양쪽 상황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설명해야 했다. (중략) 내가 멀쩡해 보이는 부모를 두고 ‘장애인’이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했다. 보기에 멀쩡한데 장애인이라고?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 「나의 모어는 수화언어」중에서 

   

그래서 집 앞에 장애인복지센터가 있어도 수어 통역사가 없다면 농아인들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대. 한데 2018년 기준, 농아인 전문복지기관이 몇 곳이나 있는 줄 아니? 전국에 단 여섯 곳, 그중 세 곳은 서울에 있고 중부권에는 손소리복지관이 유일했어. 왜냐고? “겉보기에는 그야말로 ‘멀쩡하니까’ 농아인들은 가장 ‘쉬운’, 가장 ‘불편하지 않은’ 장애인들로 여겨지곤 합니다. 그래서 가장 소외되고 있죠.” 3년이 지났으니 이제는 좀 더 많아졌을까.     

우리가 살고 있는 대전에 농아인 전문복지기관이 있다는 게 놀랍지? “녹록지 않은 세상살이에 지쳐 2011년 한 해에만 20대 청년 농아인과 10대 코다 청소년 그리고 그 청소년의 농인 아버지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일련의 사건들을 기화로 손소리복지관이 설립됐죠.” 내가 감히 헤아릴 수 없는 눈물과 아픔에 그저 먹먹하기만 했다.     


그래서 철이 일찍 들었다. 눈치 역시 백 단이었다 머리가 아닌 몸이 먼저 알아차렸다. (중략) 내가 부모를 조금이라도 부끄러워하거나 부정하는 기색을 보이는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가여운 존재가 되었다. 부모와 나의 자시를 사라졌고 말 그대로 설 곳이 없게 되었다. 부모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사전에 말하지 않으면 곤란하거나 난처한 상황이 생겼다. 남들처럼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 굳이 설명하지 않았을 뿐인데 부모의 장애를 숨기려고 했다는 오해를 받았다.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 「나의 모어는 수화언어」중에서  


이길보라 작가가 담담하게 풀어내는 이야기를 읽으면서야 오랫동안 품고 있던 의문이 풀리더라. 차마 자세한 내막까지 들춰내지 못했지만 가슴 한 편에서는 늘 궁금했거든. 20대 청년은 농인이라서, 또 농인 아버지는 아버지라서 아픈 선택을 했다지만 코다 청소년은 왜 철로에 몸을 던졌는지 말이야.      

건강하게 태어나 부모의 자랑이자 기쁨이었을 그 청소년이 이길보라 작가를 만났다면 어땠을까. 농인 부모로부터 태어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된 것은 어쩌면 ‘타고난 일’ 인지도 모르겠다는 이길보라 작가처럼 좀 더 힘내서 살아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9월의 어느 날

얼굴도 이름도 모르지만 한 때 같은 하라 살았던 귀한 이를 떠올리며 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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