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도가 능력이 될 때> 혜정의 편지
“엄마! 오늘 저녁에 영어 개강인데, 수능완성 사야 해요!”
“근데?”
“뭐가 근데야? 문제집 없으면 수업 그냥 듣는다고!”
으아... 내가 자식이라는 이름의 상전을 모시고 산다. 이 짧은 대화로 다시 한번 나를 뚜껑 열리게 녀석이 바로 다민이야. “그러니까, 너는 꼭”으로 시작하는 나의 폭풍 잔소리를 들었는지 말았는지 녀석은 인사도 없이 가방 메고 휭 나가버린다. 내 가슴에도 휭~ 바람이 분다. 어쩌겠니... 아량이 밴댕이 소갈딱지보다 못해도 난 ‘엄마’인 걸. 결국 문제집 사러 종종종 집을 나선다.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문제집·참고서 전문’ 동네 서점을 한 곳, 두 곳 지나쳐 지하철 역으로 걸어가. 웃기지? 불과 30분 전만 해도 다시는 안 볼 것처럼 소리소리 질러놓고 문제집 핑계 삼아 콧구멍에 바람 쐬고 싶어 졌거든.
중앙로역에서 내려 10여 분쯤 걸었을까. 익숙한 와플가게를 꿋꿋하게 지나 계룡문고로 향했다. 와! 평일인데도 사람들이 제법 있어. 자기를 갈고닦기를 게을리하지 않는 사람들 속에 나도 살짝 끼어 들어가 본다.
난 서울 도봉구 쌍문동에 있는 여고를 다녔어. 20-2번이라는 시내버스가 우리 동네에서 학교까지, 또 학교에서 종로까지 오갔는데 집에 바로 가기 싫은 날 종로 행에 몸을 실었지. 아기자기한 팬시점과 옷집이 많았던 성신여대 입구를 지나 청춘과 낭만의 대학로를 지나면 종로였어. 지금으로부터 25년도 더 된 그때는 대로변에 ‘종로서적’이라는 대형서점이 있었어. 김홍도의 풍속화 ‘서당’이 건물 벽면에 그려져 있던 그곳이 난 참 편했다. 이 책 저 책 기웃기웃, 그렇게 한두 시간을 보내면서 ≪강아지똥≫과 ≪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 같은 불후의 명작을 발견하기도 했지. 지금 돌아보면 핫도그 하나 사 먹을 돈 없어도 마음 편히 머무를 수 있어서 더 좋았나 봐.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책도 서점도 멀어져 갔지. 큰맘 먹고 서점에 들르면 아.... 눈앞에 보이는 책들의 풍경만으로도 압도되는 그 기분 알까? 그 많은 책들 중에 읽어본 책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 주눅 들었나 봐. 난 이미 세상과 멀어졌다고 스스로 도태됐다고, 그러니 되는 대로 막살겠다고 주문을 걸었는지도 몰라. 그래서 실로 오랜만에 나로 하여금 책을 ‘읽게 하는’ 성호와 라나를 만나 얼마나 다행인지. 그대들이 아니었다면 아마 죽을 때까지 <데미안>이랑 <올리버 트위스트>는 펴보지도 않았을 거야.
힛.. 내 사설이 길지? 그렇게 학창 시절 기억을 더듬으며 계룡문고를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녔는데 그때 딱, 내 발길을 사로잡은 책이 있었으니 바로바로 <태도가 능력이 될 때>야. 자기 계발서 코너에 놓인 수많은 책들 중에서도 왜 하필 이 책이었을까. <태도가 능력이 될 때>라는 제목보다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이 되는 법’이라는 부제가 더 가슴이 꽂힌 것 같아. 어쩌면 연초록빛 책띠지 때문이었는지 몰라. “단언컨대, 당신 혼자 해낼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문구는 다시 봐도 강렬한 걸.
나의 공식적인 경력은 2000년 1월부터 2005년 7월까지야. 대학 졸업을 앞두고 무턱대고 던져 넣었던 이력서 중에 날 선택해준 단 한 곳이 내 처음이자 마지막 직장이 되었지. 경력 5년 7개월이라 해도 이 중 15개월은 다민이 출산을 앞두고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에 썼고 퇴직 직전에는 교통사고로 1달 반이나 입원했었으니, 실제 회사에 일했던 건 50개월 남짓이네...
합격 통보를 받았을 때는 전화기에 절을 할 정도로 감사했고 첫 출근길에는 이 회사에 뼈를 묻으리라 다짐했는데... 어느새 쌈닭에 삐딱이가 되어 있더라. “고 연구원이 타주는 커피 한 잔 마셔볼까?” 회사 안에서 가장 인자하기로 소문난 옆 팀 팀장님이 놀러 오셨을 때 “아.. 그것도 업무인가요?”라고 받아쳐서 사무실 분위기를 그야말로 갑분싸로 만들기도 했어. 그때는 그게 회사 문화를 바꾸고 앞선 선배 여성들이 이뤄놓은 양성평등을 실천하는 거라 믿었는데 지금 돌아보면 부끄럽기만 하다. 무작정 남녀관계나 수직상하관계로만 단정 짓지 않고 “맛없어도 무르기 없으십니다!”라거나 “그럼, 점심 쏘시나요?”라고 일에서도 삶에서도 어린 사람답게 굴었으면 어땠을까. 사내에서 관계 맺기를 배우고 좋은 멘토를 얻었을 수도 있었는데 말이야. 그럼에도 퇴사를 선언했을 때 다들 붙잡았는데 휙 뿌리치고 당당히 퇴사했지. 하지만 한 해 두 해 나이가 들고 보니 좀 더 어른스러울 수 없었을까, 좀 더 지혜로울 수 없었을까 후회 만발이야.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이, 주제가, 한 줄 소개가 내 맘에 꽂혔나봐. 이제 지나간 시간은 어쩔 수 없지만 앞으로도 살날이 많기에 더 이상 후회하지 않고 같이 일하고 싶은 사람으로 성장하고 싶다. 성호에게도 라나에게도 계속 만나고 이야기 나누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다. 오늘도 잘 부탁해.
당당히 오늘의 마감을 넘겨 스스로가 자랑스러운 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