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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끼 Jun 05. 2020

답을 찾으려는게 아니다. 있는그대로를 보기가 힘든것이다

즉문즉설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동영상을 유튜브로  가끔 본다.

답이 없는 질문을 던지고 답을 달라고 사람들은 법륜의 답에 집중한다.

시어머니와 잘 지내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시어머니를 좋아할 수 있을지 비결을 알려달라고 하는 며느리, 남편과 사별한 여인은 매일 백팔배를  하면서 상실의 아픔을 떨쳐내는데도 괴롭기만 하다며  평온해질 수 있는 기도문을 좀  달라고 간청을 하고, 바람피운 남편을 용서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달라고 부인은 애원한다.  법륜의 답은 늘 정해져 있다.  왜  시어머니를 좋아해야 하느냐?  그냥 미워하지 않아도 성공인 인생인데,  굳이  잘 지내지 않아도 된다.
왜 용서해야 하느냐? 좀 미워해도 괞찮다. 왜 뗠쳐버리려 하느냐? 괴로운 대로 사는 거지. 질문의 답은 질문을 되돌려줌으로써
답을 풀지 말라고 한다. 즉문즉설을 오래 보다 보면  법륜의 답을 다 알고 있기에
질문하는 질문자를 유심히 분석하게 된다. 법륜의 답보다 그들의 질문과 그들의 말과 고뇌 속에 답이 보인다. 찾으려고 하는 마음과,  답이 있다고 믿고 싶어 하는 마음과,  답을 들어야 하는 마음,
답을 스스로 알고 있지만 변화되지 않는 마음. 그렇게 제자리걸음인 질문만 맴맴 돌고 있는 그들을 보면. 변화라는 건 아무리 절박한 상황에서도 쉽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
변화가 없으면 답답하고 힘든 상태를 견디어야 하는데 견딜힘도 없다면 어떻게든 답을 찾고자 하는 절실함이 생긴다.  하지만
쉽게 찾은 답으로는 순간의 변화만 있을 뿐이다. 뒤돌아 서면 다시 제자리걸음이다.
변화가 마음 안에서 정착하기 위해서는 시간이라는 터널을 오롯이 견뎌야만  오래된 나무처럼 단단해질 수 있다.

내가
변화라는 난제에 인생 처음으로 가장 당혹스럽게 부딪힌 건.
결혼과 함께 시작되는 시댁의 가부장적 분위기였다.
시댁은  공무원  집안이었고 말수가 없었고 며느리도 시누이도 모두 조용한 성격이었다. 밥상에 여자들이 겸상을 하지 않는 습관과 시아버지가 안 계셨지만 큰 아주머님의 과묵한 성격이 가부장적 스타 일속에 녹아들어  갑갑한 집안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었다. 남자들은 물 한 모금도 앉아서 한마디의 말로 해결하고 여자들은 그림자처럼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막내인 신랑은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남자였지만  형님들 사이에서 주눅이 들어 시댁만 가면 말수가 없어졌다. 신혼 초부터 분위기 파악 못한 나는  발랄한 성격으로 말도 많고  아무렇게나 행동해서 시댁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고, 매번 명절때마다 차례가 끝나면 과감하게 신랑 옆에 껌딱지처럼  붙어서 식구들의 눈총을 받으며 당당하게 아주버님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자발적인 행동 이외의 명령적 주문 같은 부탁은 묵살해버렸다.
생글거리면서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시댁 식구들은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노력했지만  뒤로는 수군 됐고 눈에 가싯거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난 변화를 만들어 내고야 말겠다 다짐하고
묵묵히 나의 방식을 고수했다.  하지만 7년 차 되던 해  드디어  시댁 식구들 사이에서 혼자 튀는 걸 포기했다.
절대 바뀔 수 없는 것도 있었다. 그렇게 변화를 포기하고  수용을 택하고
시댁의 분위기에 동화되었지만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기 위해 간격을 유지하면서  지내 왔었다.
시어머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이제는 굳이 즐겁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아서 시댁 식구들과 최소한의 관계 만을 유지하면서 살고 있지만
그리 불편하지는 않다. 내가 변화시키고자 했던 노력은 처음부터가 불가능했던 일이었다.
어쩌면 내가 그들로부터 변화되었는지 모른다. 바뀔 수 없는 것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지도... 변화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가족이라는 이유로  이제는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지 않게 되었다.
이제는 맞춰주고 배려하는 일은  최소한의 것만 하게 되었다. 지금은  차라리 그 에너지를 나를 위해 더 쓰고 있는지 모른다.
그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줄임으로써 나의 시간을 보호하게 되었다. 물론 가족 간의 따듯한 사랑을 이쁜 그림으로 그려보거나 할 때 조금 아쉬운 감도 있지만, 의무적인 만남 안에 즐겁지 않은 나를 끼워 놓는 일은 없다.
차라리 그 시간을 견디느니  혼자 책을 보는 시간이 훨씬 낫다.
어떤 사람에게 변화라는 건  이번 생에서는 불가능한 다른 삶에서나 가능한 일인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ㅎㅎ 나에게는 매 순간이 변화인데 말이다.
변화 없는 사유는 즐거움이 없다.  삶의  패턴이 늘 같다고 해도 사유는 늘 전 세계를 떠돌고 온 우주를 떠돌고 이승과 저승 모든 초월적 세계를 드나들고 있다.
이제는
변화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
조금은 거리를 두면서  그들의 문을 열어젖히는 일에 시간낭비를 하지 않는다.
그들의 삶을 존중하는 수용을 먼저 택한다. 타인들로부터 나의 견고한  세계를 지키는 일이 자신의 삷이 부정당하지 않는 소중한 일일 수도 있다. 서로를 존중하는 것이 나를 존중하는 것이다.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은 어느 시기가 오면 지겨워서 잘 보지 않는다.
 법륜의 정답은 변화가 없다. 하지만 변화 없는 그 답이 정답인 것이다.
변화를 시도하되 변화되기 힘들면
. 남이 바뀌기를 바라지 말고  
나를 변화시켜라!
나도 남도 변화시키기 힘들면
그저 받아들여라!

오늘도 답이 같은 질문을 하러 많은 이들이 법륜을 찾을 것이다.
답은 없다.
하지만 답은 또 이미 정해져 있다.

답을 몰라서 오는 것이 아니다.
행여나 내가 변화할 수 있는 마음 작은 불씨라도
지피고 싶어서  사람들은 법륜에게  질문을 한다.

자신 안의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자.
변화는 바로
자유로 가는 길에 발 내딛는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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