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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끼 Jun 09. 2020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가 있는가.

강신주



예전 인터넷에 이런 모집 안내가 올라온 걸 본 적이 있다.
창문도 없고 시계도 없으며 그림 한점 없는 스무 평 남짓한 독방에서 한 달간 고립되어 지내는 심리실험에 피실험자들을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
국내외 연구진들이 모여서 일종의 심리실험을 하는 모양이었다.
외부와의 접촉이라고는 일주일에 두 차례 연구진 중한명인 교수와 면담하는 게 전부이고 날마다 500자 내외의 일기를 작성해서 보여 주는 게 숙제였다.
하루 세 번 본인이 원하는 식사가 제공되고 꽤나 거액의 보수를 제시해 꽤 많은 신청자들이 몰렸다고 한다.
하지만 이 실험의 끔찍함에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끼친다는 사람들도 다수였다.

생각해 보라 tv나 인터넷
전화는 물론이고 책이나 신문은 일체 읽을 수 없으며 허용되는 일이라고는 종이에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창작행위뿐이다.
 시간은 소멸하고 생존은 회의에 부딪히며. 직면할 것은 오로지 나의 의식, 즉 생각과 감정과 감각뿐이다. 이러한 상상은 생각을 해보라!
아주 끔찍한 잘못을 저지른 죄수에게만 내려지는 독방이라는 형벌이나 같으며
득도한 스님의 면백 수행을 연상시킨다.
왜 자신을 대면하는 일이 이토록 유별나고 두려운 일이 되는 걸까?
만일 이 일이 이렇게 끔찍한 것이기만 한다면 왜 수도승들은 면백 수행이라는 형태의 자아탐구를 시도하는 것일까? 자신의 의식을 대면하는 일이 이토록 낯설고 두려운 일이라면 이제껏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 나는 누구인가.
나라는 존재가 있기는 한 건가?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고서도 자아를 대면하는 일은
이토록 힘든 일인데...

(모든것이 산산히 부서질때 서문 참조)



인생에 있어 질병과 역경으로 인간이 애초부터 타고난 고통이 흉측한 모습을 드러낼 때
나라는 사람은 확연하게 드러난다. 두려움과 불안이라는 가상의  
순간들에 떨면서 끊임없이 소설을 써대면서 스스로를 죽음과 공포로 몰아간다.
결국 아슬아슬한 절벽까지 나를 내몰고,
 매달린 절벽에 손을 겨우 버티고 있는 지경이 된다.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



 무시무시한 고통으로 신음하던 그때!
불쑥 이 책은 질문했다.
손을 놓으면 죽을까?
바닥에 사뿐히 내려앉을까?
바닥을 뚫고 새로운 시공간 속으로
떨어질까?

질문이 이어지는 사이 마음은
과감히 손을 놓고 나의 자아의 고통과 두려움을 직면하라는 용기를 얻는다.
그래서 손을 놓고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무문관이라는 48개의 화두 앞에 서서
불안과 두려움 속에 갇혀 허우적대고 있는 거짓 자아를  똑바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 책은 이렇게 비장하게 나와 만났다.

 이 책의 저자인 강신주 박사는 이제 워낙 유명해졌으니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고. 무문관 또한 워낙 유명한 선불교의 화두집이나
불교의 경전쯤으로 가볍게 보기에는.
화두 집안에는 내가 찾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나를 바꾸고 세상을 다르게 보는 깨달음이 숨겨져 있다.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는 강신주 박사가 자기 나름대로
무문관 48개의 화두집을 풀어낸 책이다. 쉽고 철학적 예시도 함께 풀어냈기에 재미있게 읽을 만 하지만, 이건 순전히 강신주의 화두 풀이일 뿐 나의 것이 아니다.

화두 하나를 가지고 평생을 풀 수도 있고 머릿속에서 지워버릴 수도 있고
무문관의 화두집이 맘에 들지 않는다면. 욕 한번 하고
내가 화두를 만들어서 질문해 볼 일이다. 굳이 이 어려운 중국의 화두집을 붙잡고 있을 이유는 없다. 아침에 눈을 떠서 내 옆에 누워있는 남자를 보면서
이 남자는 누구인가 라고 화두를 던져보면 된다.

좋은 질문은 힘이 세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옆에서 코를 골며 자고 있는 남자를 깨워 물어보라.

“당신이 누구야? 우리가 어떤 사이인데 30년 넘게 내 옆에서 자고 있는 거지?”

남자는 짜증을 내며 “당신 치매 왔냐?”라며 돌아 눕겠지만 잠이 다 깨고 나면 이런 생각을 할지 모른다.

“정말 아침마다 이 침대에서 눈을 뜨는 나는 누구지? 저 여자가 낳은 아이들을 위해 평생 일하고 돈을 갖다 바치는 나란 존재는 뭐냐고?”

살아오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질문을 할까? 답이 있는 질문도 있고 답이 없는 질문도 있다. 관점을 새롭게 하는 질문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사진도 찍는 각도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듯이 상황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면 새로운 깨달음이 생긴다.
관점을 바꾸는 좋은 질문은 가장 강력하고 유용한 도구다. ‘왜?’라고 잘잘못을 따져서 묻지 않고 ‘무엇을?’‘어떻게?’로 다르게 생각하게 해주는 화두 풀이는
인생에 있어 지혜를 길러준다.

 하지만 아무리 물어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다양한 자유로움이 존재하기에
즐거운 시간이다.

자신을 위한 질문, 상식을 깨는 화두

선불교의 화두(話頭)는 상식과 편견을 깨는 질문이다. 딜레마와 역설로 가득 차 있는 물음이다. 그래서 화두의 의미를 미처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은 선문답을 현실과 동떨어진 궤변으로 폄하하기도 한다.

상식으로는 풀 수 없는 화두를 왜 만들었을까? 그건 상식을 넘어가려고 했기 때문이다. 무문 스님의 화두 모음집 〈무문관(無門關)〉은 문이 없는 관문이라는 뜻이다. 문이 없는 문이라니, 제목부터가 딜레마다.

여기서 문은 모두가 알고 있는 상식의 문이다. 남들이 지나간 문을 찾을 생각이라면 무문관은 통과할 수 없다. 상식에 따라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답이 없는 딜레마겠지만 자신만의 삶을 찾는 사람에게는 쉽게 풀리는 것이 화두이다. 누구나 지나가는 문이 아니라 자신만의 문을 찾아 주인공으로 살기 위해 우리는 무문관의 화두를 붙든다. (강신주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

정답은 사람의 수만큼 많다. 자신의 답을 구하는 질문이 필요하다.

아침에 눈 비비고 생각해본다. 오늘 나에게 필요한 질문은 무엇인가?

그리고 질문 뒤에 스며드는 작은 감사!
문득문득 찾아드는 행복감!
그 힘으로 나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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