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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끼 Jun 24. 2020

우리는 모두 각자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는다.

나의 하나님 모두의 하나님.


그녀의 무릎 꿇은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날대신 해서  신에게 간절히 기도했다.

5년전
그녀가 내손을 붙잡고 간 곳은 교회 기도원이었다.

힘들어하는 날 그녀는 어떻게든 편안하게 해 주려고 하나님을 찾아서 간청해 보자고 했을 때,
평소에 그토록 거부했던 종교였지만 먹지도 자지도 못하는 지금 어쩌면 난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다. 일을 하다가  내 전화를 받고  조퇴를 하고 달려와준
고마운 그녀였기에 난 그녀가 그 어떤 곳을 데려가더라도 그냥 따라갔을 것이다.
사고 후 뼈는 붙었고 몸은 회복됐지만  외상 후 스트레스 때문에 우울증이 강박증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정신과 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버텼기 때문에 가족들은  나의 스트레스를 다 받아내는데 지쳐가고 있었다.
단 한 사람 나를 포기하지 않는 친구. 그녀가 곁에 있었다. 내가 기댈 수 있었던 곳은 그녀밖에 없었다.  무슨 말을 해도 어떤 행동을 해도  그녀 앞에서는 괜찮았다.
내가 병자처럼 느껴지지 않았고. 아프다는 말이 편하게 나왔다.


난생처음으로 기도원이라는 곳에 들어섰을 때.  난 거부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찬송가 소리가 들리고 목사의 설교 소리가 장황하게 울리고.
울면서 기도 하는 사람. 아맨 이라고 소리치는 사람. 목사가 손으로 이상한 제스처를 취할 때마다 쓰러지는 사람도 있었다.  장풍을 날리는 것 같은 자세에 사람들이 쓰러지는 코미디 같은 풍경을 보면서 기가 막혀서 어리둥절한 나의 손을, 그녀가 꼭 잡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기도할 때 두 무릎을 가지런히 꿇었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낮은 자세.
신에게 자신을 내어 보이는 가장 성스러운 자세를 하고.
그녀는 기도를 했다.  하지만 정작 아픈 사람 이었던 나는 신의 구원이 필요한 나는
양반다리를 하고 무릎을 꿇을 수 없었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경건함이란 자세나
모습 그 어떤 행위를 동반하지 않는 그저 마음의 경건함이었다.
그녀가 절규하면서 통성기도를 하는 동안,  정작 간절해서 찾아온  나는 고요하게 눈 감고 앉아있었다. 나는 그녀가 간절하게  찾아 헤매는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지 못했고,
그녀의 그 절규하는 그 모습을 어색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날 위해  조퇴까지 하고   달려와 준 고마운 그녀가 건강한 그녀가 나 대신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께 기도를 하고 있었다. 정작 울어야 할 사람은 나인데... 왜 그녀가 울고 있는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고맙고  미안하고 안쓰럽고 저렇게 마음을 다해 울 수 있는 그녀가 부러웠다.  기도원 안의 사람들은 모두  절규하면서 찬송가를 불렀다.
모두가 나보다 더 아픈 사람 같았고, 모두가 반쯤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그들 사이에 이방인이었고 맹숭맹숭하게 앉아 있었다.
믿기만 하면 지금의 모든 고통을 잊게 해 준다는 목사의 설교는  귀에 솔깃했지만
왜 이토록 인간이 비굴하고 낮아져야지만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시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인간은 죄인이어서 벌레만도 못한 쓰레기가 되어야지만 하나님이 구원해 주신다는 믿음은 도대체 하나님의 뜻 일리가 없다고 내내 마음속에서 외치고 있었다.
왜 꼭  무릎을 꿇어야 하는지 왜 인간이 가장 천하다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매달려야지만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는지, 어째서 하나님은 자신의 피조물인 인간을 이렇게 종취급 하는지 더

더 더 낮아져서  자신을 버리고 목놓아 하나님께 발가벚고 매달리라는 목사의 이야기에 사람들은 열광했고. 더 더 낮아지려고 자신을 학대할 준비까지 되어 있는 광기가 무서워서 나는 빨리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나는 아팠지만 ,   그녀를 따라 간 그곳에서  그날 나는 내가 건강하다는 걸 알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었고, 자신의 마음을 판단하고  움직이는 힘을 주셨다. 나를 잃지 않고 있다면 하나님은 그 누구의 마음 안으로도 들어오신다.
믿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그날 그곳에서 나도 하나님을 만났다.
나만의 하나님을...


"목사님. 전 요즘 기도에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제 인간적인 면이 자꾸 약해지는 게 너무 두려워요. 친구들의 슬픔도 내 아픔으로 먼저  안 느껴지고, 아주 질한 저도 잘 안 보이고, 감정들이 너무 평면적이 되는 거 같아요."


미소를 만면에 띄우신 목사님은 대답하신다.

"그건 담대해진다는 증거여요. 하나님의 사랑이 점점 강하게 마음에 와닿는 증거예요. 잘하고 있는거예요. 지금처럼 열심 히 기도만 하시면 되요. 믿기만 하세요. 세상적인것 인간적인걸 멀리하세요.그것이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는  길입니다."

"근데 목사님. 그거 아세요.? 목사님은 세상의 것을 멀리한다고 하셨죠?"

:하나님은 이웃을 사랑하라  원수도 사랑하라고 했어요. 그리고 자기 자신도 사랑하라고 했어요.
이웃을 사랑하려면 그들 안에서 그들의 마음을 느끼고 함께 아파할 줄 알고 인간적인 마음이어야 하잖아요?
강하고 냉정한 마음으로는 이웃의 눈물 한 방울도 슬픔으로 느낄 수 없어요.


하나님을 믿는다면 인간적인 거 세상적인 것들을 왜 멀리해야 하죠, 믿는다면서 무엇이 두려운 거지요. 무얼 하든 어디에 있든 믿는다면 두려움 없이 다 받아들여야 하는 거 아닌가요?"


하나님은 제 머리 락 한올 까지도 아시는데, 저에 대해 다 아시는 분인데...
왜 매일 기도해야 되는 건가요? 기도하지 않아도

마음으로 신과 교감하고  늘 하나님을 믿고 사랑을 실천하면서 열심히 살고 있는 내 모습을 보여드리는 게 더 중요하지 않나요?

"목사님 제가 왜 교회를 안 다닌 줄 아세요?
어렸을 적 맛있는 걸 주었던 성경학교를 매일 나갔었어요. 그때 교회에서
믿는 자만 죽어서 천당에 간다고 했어요. 우리 가족이 죽으면 저만 천당에 가고 우리는 이산가족이 되는 거잖아요. 사랑의 하나님이 천국과 지옥 따위 만들어 놓을 리 없어요.
착한 우리 가족을 지옥에 보낼 리 없어요.."

저를 창조하신 하나님
저의 머리카락 한올까지도 아시는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저는 한때 하나님을 오해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기도원에서 저는 나만의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목사가 이야기하는 내용을 듣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힘든 시절 제가 살기 위해서 하나님께 매달렸던 그때의 저의 오만함과
이기성 무지를 잊을 수가 없어요.  하나님은 이미 저에게 모든 걸 주셨고
나를 사랑하는데. 그런 내 안의 믿음을 의심했기에 교회 안의 이야기를 듣고서
매달리고 또 매달리면서 내 이야기만을 들어달라고 기도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내상태가  좋아지면 기도의 결과였고.
나빠지면 기도가 모자란 결과였고.
좋아지면 더 더 기도해서 기도로써  증영해 보여야 했고.

나만을 사랑해 달라고 이기적으로 특혜를 원했던 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만을 사랑한다고 우쭐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목사의 말에 더 의지해서 목사가 시키는 대로 하나님을 보았던 적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내 안에 있는데... 하나님에게 집착하는 못난 나였던 적이 있았습니다.
나 스스로를 부정하고 죄인으로 만들어 하나님이 창조하신 고귀한 영혼을 학대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에게 모든 걸 맡기면 되는데.... 기도해야만 하나님이 들어주신다는 믿음으로 내 안에 있는 하나님보다
, 하나님을 마치 기도나 , 헌금, 희생. 피나는 선행 노력으로 도달할 수 있는 보상의 열매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내가 숨 쉬는 공기인데.....
언제나 기도나 참회. 선행 후의 노력의 결과물로만 알았습니다.
내 안에 존재하는 지금 나로서 현존하시는 하나님.
지금 이 순간이 바로 당신입니다.
당신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순간이 바로 하나님의 숨결입니다.
하니님은 나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분별하지 않는 세상의 모든 다름속에도 하나님은 존재합니다.
악 안에서도 존재합니다.
바로 선과 악의 같은 얼굴로써도 존재합니다.
당신은 늘 나를 절대적으로 보라고 합니다.
그 속에서 당신의 모습은 늘 평온하게 웃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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