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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끼 Aug 30. 2020

마음의 병은 논리가 없다

비논리적

지인 중에 심리치료 전문가가 있다.
그녀를 사적으로 만나 심리치료법에 대해 설명을 들은 적이 있었다.
다양한 심리전문가들의 개인마다 상담치료법이 다르겠지만
그녀의 상담내용에는  금기어  같은 게 있다.
흰두이즘, 명상 , 요가 , 무아 이런 것들을 심리치료에서 배제하는 것이다.
그녀의 논리는  이렇다. 우울이나 불안증 환자들은 색즉시공도 공 즉시 색도 안되고
공으로 이루려다가 허무주의나 우울의 늪에 더 깊이 빠진 다는 것이다.
그래서 늘 논리적인 심리적 접근법으로 내담자를 상담한다는 것이다.

공감과 자기이해 위로와 자기긍정 마음의 심리학적 접근법으로
논리적으로 이성을 바로잡으면서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것이 언제나 우선이라는 이야기를 하곤 한다.

사람의 마음을 다루는 일에 있어 논리가 내면을 치유할 수 있을까?
나는 그 말에 반대한다.
마음은 역설적이게도 논리를 따르지 않는다.
논리적인 사고방식은 마음이 만들어내는 습관과 비슷하다.
논리는 그 스스로 존재하고 삶은 스스로의 논리에 맞추어져야 한다.
마음 안에는 그 어떤 논리도 없다. 우리의 마음을 정화시키는 아름다운 시 한 편에는
그 어떤 논리 따위는 없다.


논리는 음악안에서 기계음만 될 뿐이다.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 안에 무슨 논리가 있는가!  

수학적 논리는 눈부신 과학의 발전을 이루어 냈다.  사유의 논리도 인문학을 꽃피웠다.
하지만
논리는 인간을  통제하고 질서를 유지하고 조직을 유지하기 위한 법 조항이나 윤리의식이나 인간이 만들어놓은 규범 안에서 폭력적이며 강압적인  논리의 근본 속성도 있다.
논리는 고정화된 이미지를 만들어 믿게 만들고
그 고정화된 사실을 믿음인 양 강요한다. 철학적인 논쟁 속에서
갖가지 가설을 만들어내고 논리로써 증명해 보이지만 냉정하게 따져보면 그저 한 개인의  견해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무수한 논리들을 만들고 그 논리에 맞추어 사고하려고
교육받고 또한 자신에게 맞는 논리들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 논리 자체가 우리의 사고를 관념 안에 가두기도 한다.
논리 자체가  마음 안에서 여러 가지  불안감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논리는 자비심이 없고 이타심이 없고 유연하지 못하다.

하지만 마음의  내면에는
논리가 없다.
역설적이게도 죽음은 삶 속에 포함되어 있고  삷이 곧 죽음이다.
행복 안에 불행이 함께 있고 고가 곧 락인 것처럼.....
논리적인 삶은 마치 직선적인 삶과도 같다.
마음은 곡선을 따라 흐른다.
생각이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논리적인 생각도 그때그때 다르게 변한다.
변하는 것도 논리라고 주장한다면.
이런 논리의 역설적인 측면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논리의 오류에 빠져서
적응하느냐 못하느냐! 살아남느냐 살아남자 못하느냐.
극복하느냐 좌절하느냐 하는 답만 안고 살게 될 것이다.

의사들이나  심리상담가들은  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고
자신의 논리에 맞게 환자나  내담자를 치료한다.
내담자의 상태에 자신을 맞추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 상대를 맞춘다.

마음의 병은 이유가 있지만 이유가 없기도 하다.
트라우마는 보다 근본적인 인간의 본질 안에 있다.
인간 본연의 마음 무아나 참나의 근원을 모른다면
모래성에다가 계속 성만 쌓고 있을 뿐 마음의 대지에다가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한번  어긋난 마음은 마음의 본래 자리를 찾아가야 한다.
가장 기본적인 그 자리인 지금  여기 텅 빈 완전한 마음의 근원을 느끼지 않고서는
어떤 의식의 확장도 이루어 낼 수가 없다.
위로받고 사랑하고 의지를 다잡는 그런 문제보다 더 마음의 근원을 알아차려야 하고
그 알아차리는 의식의 확장을 배우는 훈련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철학을 배우고 문학을 읽고 인문학을 공부하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있는 그대로의 본질인 무아 텅 빈 나의  본래의 고요한 공의  상태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인간의 본질에 다가가지 않는 정신과 치료는 결국은 의사와  약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심리상담가의  관심과 위로.보호에만 의존하게 되는  딜레마에 빠질 것이다.

비전문가로써의 나의 글도 앞뒤가 맞지 않는 역설 투성이다.
논리적으로 이야기하기 위해
인용구를 찾고
예시를 들고 그런 걸 하지 않는 이유는
내가 논리적인 사람이 못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논리적이지  않아서 나는 내 글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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