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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끼 Sep 09. 2020

타인의 고통 1

통렌명상

중증의 고통을 달고 사는  말기암환자나

원인모를 희귀병으로  하루하루 자신의 몸과 사투를 벌이면서  일상을 살고 죽음과 마주하는 이야기를 담은 글들을  블로그나 브런치 등을 통해서  종종 접한다. 죽음 앞에서도  정신이 꺾이지 않고 고통과 절망이 뒤범벅된 글을 자신만의 이야기로  쓸 수 있다는 건  아마도 죽음을 초월하였거나 모든 걸  내려 놓았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몸과  마음이 아프던 시절  나는 이런 글들을 읽으면서 마음의 위안을 얻고  내 마음이 치유되기도 했었다.


타인의 고통, 타인의 비참함에 "그래도 난 이 정도는  아니니 얼마나 다행이야" 하는 안도감은 아니었다.


남의 불행위에 나의 위안을 쌓고 싶은 마음 또한 더더욱 아니었다.

그런 마음으로 글을 대했다면 절대로 내 마음의 치유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타인의 고통을 그저 나의 위안이나 심심풀이로 여긴다면 잠깐은 위안을 받겠지만 나중에는 역으로  내 무의식 속 고통을 끄집어내는 계기를 만들어  내가 고통받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타인의 고통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은  자신의 고통에 대해 있는 그대로 써본  사람만이 그 글의 농도를 고스란히 알 수가 있다.


아프다 아프다 한마디도 쓰지 않았는데도 칼에 베이는 듯한 아픔이 느껴지고,

슬프다 슬프다 한마디 쓰지 않아도 눈물이 베어나게 한다.


자신의 아픔에 대해 써 내려가는 그 마음의 고통을 함께 느끼고 그 고통을 대하는 마음 안으로 들어가서 함께 느낄 수 있고 그 고통이 나에게로 와서 아픔이 되는 게 아니라

치유가 된다.


나는 미디어를 잘 보지 않는다. 쇼프로든 다큐멘터리든  활자가 주는 느낌의 안착 없이

그저 소비되어 버리는 공허함 때문이디.

 미디어에서 다루어지는

아픈 사람들이나 장애인  또는 벼랑 끝에선 사람들의 감동 휴먼스토리를 다룬 영상들은

특히  보지 않는다.  그분들의 고군분투나 고통들이 비장애인이나 건강한 사람들에게

감동을 부여하기 위한 감동 포르노처럼 느껴진다. 미디 속  영상은 아무리 그 의도가 순수하고  각색이 없이 리얼로 제작되었다 하더라도, 자신의 영혼을 담을 수가 없다.

시청자들은 관음자처럼 보이고.

남의 불행위에 나의 행복을 쌓는 행위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글은  다르다.  날것 그대로의 철저히 혼자만의 사투이고 자신과의 싸움이다.

고통을 대면하는 글은 오롯이 스스로의 성찰 안에서만이 가능하다.

그러기에 그런 글들은 사람들을 치유한다.

또한 나의 글에 내가 치유받기도 한다.  처음에는 그저 아프다 아프다 라고 시작되는 글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아픔과 고통을 기록하는 시간 그 시간의 소중함을 알기에  마음은 그 시간의 기록으로 받아들이는 힘을 키우고 아픔의 농도를 가감해 나간다. 고통을  쓸 수 있다는 건 고통을 뛰어넘어선 것이다.


고통을 초월한다는 건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오늘  고통을 받아들이는 명상을 한다.

내고 통뿐만 아니라 타인의 고통까지 모두 받아들이고 느끼고 그 고통을 느끼고

평온이라는 이름으로  되돌려 본다.

모두 평온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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