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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끼 Sep 21. 2020

별거 아닌 인생

재능

고흐의 그림 같은 인생


삶이 무얼까?
몸이 아프거나 정신이 아프면 날것 그대로의 본능적인 욕망만을 소망하게 된다.

덕분에

창가에 쏟아지는 햇살같은

아주작은것들의  일상도 살떨리게 고맙고 감사해 진다.
한 끼의 식사라도 맛나게 먹을 수 있기를 소망하고,
딱 하루의 편안한 잠을 소망하고, 단 하루의 평온한 일상만이라도  소망한다.
한 끼의 식사가 해결되고 몸이  편안해 지기 시작하면 즐거운 것들을 욕망하고 , 즐거운 것들이 채워지면, 욕망하는 것들을 소유하고

싶어지고  인정받는 삶을 살고 싶어 진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또  조금씩 더 채워지고 누리는 생활이 지속되면  허무해진다.

문득 이런 질문을 한다.

"겨우 이거였나?

이딴걸  즐기려고 가지려고

그렇게  소망  했었나?결국 고통의 순간이나 별차이가 없잖아"

그렇게 마음이 다시 절벽에 선다.

 소유한 것들을
잃을까 두렵고, 즐거움이 사라질까 두렵고, 몸이 다시 아플까 두려워진다.
그렇게 채워지고 , 비워지고 , 잃어버리고, 다시 소망하고, 절망하고, 또다시 조금씩 채워지고, 이렇게 순환하면서  되풀이되는 게 인생이다.
냉탕과 온탕을 오고 가던 행복과 절망의 기억은  몸이 최악이었던  상태의  절망과
최상이었던 상태의 행복을 비슷한 기억의 공간에 가져다 놓는다.
즐겁고 행복한 시간도. 고통스러운 절망의 시간도. 오래  머물지 못하고 사라진다.
시간 안에서의 모든 감정들은  모두  너무나 공평하다.  이것이 진리이다.
고통과 절망의 시간은  기억히고 싶지 않고
돌아가고 싶지않겠지만  그 시간 안에서의 내 생이 간절했고  진실하고 진정한 나 다운 모습이고 나 다운 생각이 되는 시간이다.
행복한 시간 속 사람들의 모습은 모두 비슷비슷하다. 즐거움은 인간을 모두 똑같이 만든다.
하지만 고통과  불행의  모습 속 사람들은 저마다 다르다.
불행 안에서는 각자의 모습들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고통을 다루는  방법을 우리는 배우지 못했다.
이런  재능은 고통의 대가를
치르고 얻어진다고 한다.
행복의 두 얼굴을 함께 바라볼 수 있는 재능은 행복의 순간과 고통의 시간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걸 알게 한다.
행복할 때 왜 불행을 떠올리느냐고 누군가는 말하겠지만, 아니다.. 지금 이  행복이 과거가 되고 미래 속에 존재하는 불행의 원천이 되리라는 걸 우리는 누구나 안다.
자아성찰은 고통과 불행을 다루는 재능이다.
그 첫 번째 재능은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행복과 불행을 두 얼굴이 아닌 하나의 얼굴로 바라보게 한다.
그 두 번째 재능은
지금 이 순간 속에 머물러 행복하기이다.
이것은 행복과 불행을 즐기는 법은 알려준다.
그 세 번째 재능은
기꺼이 수용하고 사랑하기이다.
이것은 행복과 불행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수용이다.
고난과 시련의 대가를 치르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런 재능으로 세상을 보고 일상을
살아간다면
불행과 행복을 같은 방식으로 곁에 둘 수가 있다.
삶은 무얼까 라는 질문에....
삶은 아침에는 지옥이었다가. 밤에는 천국이 되고.
매 순간이 지옥이었다가 매 순간이 천국이 되는 순환이라고 답한다.
삶이란
인생이라는  허상이 춤을 추다가
 지금 이 순간을 만나  머물고 또

허상속에

사라지는  환영 같은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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