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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끼 Sep 20. 2020

두려움의 근원

사랑과 자비


내 두려움의 근원에 대하여.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국립현충원 뒷산을 1시간  산행해서  
가파른 계단을 내려오니 한강둔치가  나타난다.

땡볕을 걸었더니  다리에 힘이 풀려 의자에서 한참은  쉬어야 했다.
자전거를 타고  한강변을 질주하는 젊은이들의 페달 밟는 발은 무서운 속도로 달린다. 오늘 하루 그들의 자전거는  땀방울에 도전을  하나보다. 체력의 끝을 향해 젊음이 열기를 뿜어낸다. 물끄러미 그들이 지나간 흔적의 꽁무니를 본다.
 미친 듯이 달리지만 지칠 줄 모르는 체력을 가진 젊음은 인생에서 잠시 누리는 호사스러운 시절인지 모른다. 아니면 타고난 체력을 갖고 태어나 평생을 간강 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다.

건강하게 평생을 산다는건 축복이 아닐까 싶다.
7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나는 어렸을 때부터 그다지 건강하지 못했다. 40이 훌쩍 넘어서 나를 낳은 부모남의  노화된 유전 인자 탓일까? 어렸을 때부터 잔병치레도 많이 하고 골골했던 나는 겨우 정상의 체력을 유지하면서 성인이 되었지만 30대 초에 갑상선에 이상이 생겨 수술을 하고 평생 흐르몬제를 먹어야 하는 운명이 되었다.
그때부터 건강염려증이 생긴 건지 모른다.
하지만 낙천적인 성격을 가진 나는  비교적 신체적 이상 징후에 대해 둔감한 편이었다.
외상 후 스트레스로 신체적 반응이 극심했을 때 처음에는 두려웠지만
같은 증상에 잘 대처하고 모른 척하는 마음훈련이 유연한 편이었다.
그런 이유에선지  같은 증상으로  고생하지는 않았다.
 설사 증상이 나타난다고 해도 조용히 지나가곤 했다. 하지만 공황장애란 증상은 아주 영리한 놈이다.
늘 같은 증상으로 나를 찾아오지 않는다.
호흡 멋을것처럼 숨이 안 쉬어져도 내가 무시하면 마치 장난인 듯 사라진다.
하지만 문제는 처음 겪어보는 증상에는 속수무책이다.
무의식적으로 두려움이 나타나고 두려움의 강도에 굴복하거나 저항하면
그 증상으로 인한 죽음의 공포가 되살아 난다.
그리고 불안감이 증폭되면 결과는  불면증으로 이어진다.
낮시간 동안은 친구처럼 잘 지낼 수 있다. 하지만 밤이 와도 같이 놀자고 하니 그것이 문제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증상이 바로  불면증이다.
7년이라는 시간 동안 좋았다 나빴다를 반복하면서
서너 시간만 자도 그냥 감사하면서 지냈었다.

면증의 밑바닥은 역시나 죽음에 대한 공포의 증폭이다.
잠을 자지 못하면 몸이 좋지 않을 것이고
몸이 좋지 않으면 죽을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고
결국 마지막 앤딩은 죽음과 만난다.
결국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면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하지먼 이 죽음에 대힌 두려움 애 서 벗어난다는 건
내 인생 전체의 설계도를 다시 그리고 내 안으로 깊이 들어가서 ,
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근원부터 찾아보아야 한다.
어머니는 나를  임신하고 두려웠다고 한다. 40이 훌쩍 넘었고, 그때 집안 형편도 좋지 않아서 나를 없애고 싶어 했다고 했다.  유산을 몇 번을 마음먹었다가 결국은 낳기로 했는데...
임신 내내 어머니는 어쩌면 나의 존재 여부를 두고 고민했던 것이다. 나의 존재가
감사함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나는

존재하느냐 마느냐의  생을 가르는 선택의 기로에 있었다.
그러고 보면 어쩌면 죽음에 대한 무의식의 공포는 태아 때 이마  형성된
무의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든다.
지금의 나는 몸 어디만 아파도 움찔거리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는
 간강 염려증은 일종의 수치심과도 연결되어 있다.
그깟 건강염려증 하나 때문에 내가 이렇게 마음이 망가진다는 게 말이 되나 하는
자기 비하나 연약한 스스로에 대한 수치심이 포함된다.  지난번 글에서 썼듯이 나의 수치심은 이타적인 마음에서 출발했다고 쓴 적이 있다. 나의 건강염려증은 나의 안위보다도 가족의 안위가 먼저였다.
내 삶은 이타적인 삶이었다. 적어도 무늬는 늘 그랬다.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배웠고,
그것이 최선의 삶이고 숭고한 삶이라고 여겼었다.
나는 이런 이타적인 삶이 뼈속까지 나의 삶을 지배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나의 이타심은 내 건강이 삐걱거릴 때마다 내가 먼저 살아야겠다고 아우성을 친다.
희생과 헌신을 할 정도의  관대함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데 어떻게 타인을 위해 희생할 마음이 있겠는가! 하지만 내 이타심은 언제나 나에게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나를 괴롭혔다.
나의 본성은 이타적인 것들을 멀리하면  삐걱거린다.
이기적인 것보다는 차라리 이타적인 것이 훨씬 쉬웠다.
쉬웠다기보다는 마음이 편했다. 그래서 참고 인내하며 살아온 듯했다.
미움받을 용기가 없어서 선택한 이타성과 타인을 향한 자비 사이에서 마음은 늘 갈팡질팡했다.

이기심보다 이타성을 선택했다면. 진정한 나를 위한 이타성이어야 했다.
그런 이유로 나의 이타성은 내가 나를 완전히 죽여야만 나는 이 죽음의 두려움에서 니올 수가 있다.
진정한 이타성을 마음으로 느끼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나를 완전히 타인을 위해서 죽여야만 가능하다. 무늬만 이타성이어서는
나를 두려움에서 건져 낼 수가 없다,
예수가 자신을 희생하고 죽음을 받아들여서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했듯이...
붓다가 자신의 모든 걸 내려놓고 해탈의 길로 들어 썼듯이...
나에게도 나를 불싸를만한 그 무언가가 있어야지 이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온전하게 나를 죽이는 방법.
나도 예수처럼 붓다처럼  기꺼이  죽을 수 있는 그 마음만이 나를 살리는 길이다.
흉내만 내어서도 안된다.
일시적인 감정이어도 안된다. 타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내가 죽어야 한다.

누군가를 위해 아니 나 자신을 위해 지금  죽을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마음이 기꺼이 "예스"라고 답했을 때
나는 비로써 죽음의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진다.
죽음과 번뇌 고뇌의 끝은 기꺼이 하려는 마음으로
기꺼이 자신을 죽이고
내려놓는 마음이 있다면 마음의 치유가 일어날 수 있다.
불안은  내가 아직도 나를 놓지 못하고
두려움에 휩싸여있다는 증거이다.

기꺼이 희생하고  죽겠다는 마음
그 마음은 그 어떤 질병에서도 마음이 자유로울 수 있다.
이 마음은 쉬운 듯하면서도 절대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내면에서  죽기로 마음먹는 순간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는 사실은
경험해본 사람만이 알 수가 앗다.
단 한치의 의심도 없어야 한다.
이 마음을 먹기까지는 에고의 저항이 엄청 날 것이다,
매 순간 다 른생각들로 내 마음을 흩트려 뜨릴 것이다.
내가 죽기로 정한 순간 에고의 죽음과도 같은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니까.
에고는 나이면서 나의 욕망 덩어리이고 나의 아군이면서 적이다.
내가 완전한 이타심으로 변화하면 에고는 더 이상 날뛰지 않고 순한 양이 된다.
하지만 내 마음이 어정쩡할 때 에고는 날뛴다.
에고는 왜 나의 안전을 위협하는 생각들을 하는 걸까.
그것이 바로 에고의 특징이다.
에고는 과거와 미래를 먹고사는 나의 과거의 욕 망애 의지하고 미래의 욕망을 먹고 살아간다.
몸이 아프면 더 생생하게 날뛰는 게 에고의 참모습이다.
몸이 아프면 에고는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지 못하기 때문에
끝없이 나를 채근하고 탈출하려고 한다.
아픈 몸을 살살 달래서 나를 위하는 개 아니라
아프지 않은 내 몸에 집착하게 하고. 그러지 못하개 되자 미래의 걱정을 만들어낸다.
잠시도 지금 이 순간에 머물러 자신을 돌보지 못하게 한다.
물론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도 한다.
하지만 결과가  좋지 못하면 더더욱 절망해버린다.
에고가 날뛰지 않으려면 내 마음의 이타심을 찾아야 한다.
나를 살리는 이타심은 결국 내가 죽는 것 에고가 죽는 방법 말고는 방법이 없다.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고  내가 죽는 것만이 방법이다.
반야심경이 말하는 참나는 분별심이 없는 나를 찾는 것이다.
분별심이 없는 나란 내가 온전하게 죽어있는 상태이다.
나를 온전하게 죽으려면 바로 이 이타심이
 내면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모든 걸 허용해야 한다.
 이타심이란  사랑이고 자비이다.
사랑과 자비의 가장 근원은 결국 나를 위한 것이다.
타인을 위하는 것의 근원은  결국 나를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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