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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끼 Oct 03. 2020

위대한 침묵 속의 죽음

카르토 시오 수도원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씨네코드 선재는 서울 삼청동에 있는 예술영화 전용 극장이었다.
 2015년도에 폐관됐는데, 아쉽게도 딱 한번 이곳에서 영화를 보았다.
그때 보았던 영화조차도 잊고 있었는데, 요 며칠   경북 상주에 있는 카르투시오  봉쇄수도원이란  세상끝의 집 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위대한 침묵"이라는 다큐영화였다.
 두 시간이 좀 넘는 영화 상영 동안 1시간을 편하게 잠을 청한 영화로만 기억될 뿐 영화 내용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그때 함께 영화를 본 언니는 무척이나 내가 좋아하는 언니였고 진지하고 몰입해서 보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며  졸면서 보고 있는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고 허벅지를 찌르며 보았던 내 모습도  선명하다. 첫 장면부터 꼼짝하지 않고 기도하는 수사의 화면이 시작된다.
혹 화면을 정지시켜놓은 건 아닌가 싶은 의구심으로 인내력이 바닥이 나서야 다음 화면으로 바뀐다.
영화 자체가 아무런 소리가 없고 조명도 없는 어두운 화면에 수도사들이 종일 미사와 기도  묵상하고 침묵하며 지내는 일상의  모습만 보다 보니, 아무리 호기심 충만이라도 같은 영상을 반복해서 본다는 건 끔찍한 고문같았다.
.그때는 그랬다. 유일하게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영화 속 장면은  구두를 수선하는 구두수선공의 수사가 낡은 구두를 수리할 때 정도이고,  유일한 대사는 마지막 한 시각장애인 수도사의 짧은 대사 몇 마디로 영화는 끝난다.
그저 호기심 정도로 끝나버리고 영화 내용은  침묵을 지켜야 했던  영화였다.
12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다시 침묵 속으로 빨려 들어간 영화는
숨소리 하나도 나를 자극했고 기도하는 작은 손길 하나에도 시선이 따라다니고 눈빛 하나에도 마음이 움직였다.
두 시간이 몇 분처럼 느껴졌고,
연이어  카르투시오 봉쇄 수도원이란 1시간짜리 다큐를 3편까지 꼼짝 않고 보았다.
그들이 선택한 규율이 정해진 봉쇄 수도원에서의 수사의 길은  무신론자인 입장으로 볼 때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하느님의 은총으로 충만한 삶을 살면서
그들이 후회 없는 행복한  
 마음으로 살고 있는 모습이 느껴졌다. 한번 태어난 인생
굳이 저렇게 까지 하면서 살아야 하나?
철저한 수도원의 규율에 따라 생활하면서 자신의 자유를 버리고.
1년에  딱 한번 가족의 면회를 할 수 있다.
가족과 식사도 해서도  안되고 함께 잠을 자서도 안된다.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수도원의 독방에서 하루한끼의  육식을 배제한 식사를   혼자 먹고 한 끼의 식사 중 일주일의 한 번은 금식의 차원에서 밥과 물로만 된 식사를 하며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구멍이 난 양말을 기워 신고 철저하게 금욕하면서
  텃밭이 딸린 숙소에서 잠깐의 텃밭을 가꾸는 노동 이외의 시간은 오로지 침묵하면서   미사와 묵상 , 기도 로써 보낸다.
일주일에 몇 번은 공동체 안의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며 식사도 하고 대화도 나누지만 그 외의 시간은  혼자만의 침묵 속에서 보낸다.
그리고 그곳에서 생을 마친다. 죽지 않고서는 그곳을 나 올 수 없다.
신을 믿는 방법이 모두 같을 수는 없다. 평생을 하느님께 은총을 드리고 자신을 침묵 속에 가두고 기도와 묵상으로 신을 믿는 봉쇄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죽어서 수도원에 묻히는 것으로 하느님에게로 돌아간다.
그들은 왜 봉사와 사역을 통한 신앙이 아닌 봉쇄된 침묵을 선택한 걸까?
세상의 로부터의 도피일까? 신에 대한 자신의 헌신을 다른 차원으로 경배드리고 싶은 우월감일까? 침묵의 기도 속에는 세계평화와 염원 가난한 자들 고통받는 자들 평안함을 기도한다.
그들의 기도가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을까?
그들은 그저 자신의 영혼의 안식만을 바라는 건 아닐까?
무엇을 위해서 이런 선택을 한 것일까?

한번 태어난 인생
굳이 저렇게 까지 하면서 살아야 하나? 평범하게 살아온 인생에서 저런 선택을 하는 걸까? 아니면 굴곡진 인생이어서 한 선택일까?
 자유도 없고 인간이 누리는 즐거운 희로애락도 없이 자신을 절제하고 하루하루 똑같은 행동으로 산다는 거  시지프스의 형벌을 연상하게 한다.

그들은 죽음 이후의 삶을 위해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고 위대한 침묵을 선택한다.

무안한 자유가 주어진 삶.  그 자유는 때론 방임이 되어 삶을 파괴한다.
마약과, 술 , 돈, 섹스,  권력, 부 , 명예에 중독되어 스스로 파멸하기도 한다.
목숨은 때론 가치없이 사라지기도 하고 숭고하게 사라지기도 한다.
죽음이 보이는데도 인간은 욕망 때문에  불구덩이에 뛰어들고,  욕망을 버리고 희생이라는 선택을 하기도 한다.
자신이 죽는 순간도 모르고 불의의  사고를 당해  순식간에 한 생명이  사라지기도 한다.
몇 년을 질병 속에서 신음하다가 죽기도 한다.

인간이 지닌 다양한 경험과 감정은 자유 안에서 성숙한다.
스스로를 가두어서 절제하는 삶이라고 해서 세상 밖 세상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된다. 느끼는 감정들은 모두 똑같다. 단지 방식이 다를
뿐이다.
카르투시오 수사들은 죽음을 기다리는 순간을 축복으로 여긴다.
하느님에게로 돌아가는 시간.
마치 죽음의 그 순간을 위해 평생을 살아온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긴 인생은 찬란했지만 죽음 앞에서 그저 순간처럼 느껴지고  죽음만이 긴 영원처럼 느껴진다.

카르투시오 수사들은 시지프스의 형벌처럼 자신을 가두는 절제된 삶이 었지만
죽음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올수록   자유에 가까워지고 하느님의 사랑을 경험한다고 한다.
그들이 선택한 삶이 신에게 현생 삶을 기도와 욕망을 절제한 가난한 삶으로

바치고 영생을 받은 것이라면
그들은 정말 행복하게 죽기 위해서 전생을 바치는 것이 된다.


인생은 건강할 때 찬란한 세상으로 빛이 나지만 질병을 선고받고 죽음이 임박하면
빛을 잃고 고통 안에서 마지막 순간을 맞는다.
우리에게도 죽음이라는 시간이 축복이고 자유일 수 있다면,
지금 내가 어떤  선택을 하면서 나의 시간을 살고 있는지에 달려있다.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위해 열심히 살아온 인생이  죽음에 이르러 악몽 같은 시간이 돼버린다면
생은 얼마나 비참한가!  어차피 죽음은 인간의 숙명이고 태어난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가고 있는데.
어째서 죽음이 인간에게 재앙이 되어야 한단 말인가!

죽음 그 찰나를 준비하기 위해 평생을 사는 사람도 있다.
매 순간 죽음을 위해 위해 산다면  
죽음 속에서도 인생의 환희를 볼 수 있다.
죽음과 생은 이렇게 같은 모습이다.
죽음을 준비할 필요도 없다 지금 죽은 것처럼 살면 된다.
죽음 앞에 육체적 고통은 삶에 대한 마지막 미련을  내려놓는  과정이다.
그 고통을 받아들이는 자만이 죽음을 달게 맞는다.
고통은 자유를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껴안고 사는 삶이 축복이고 은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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