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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끼 Oct 23. 2020

종교가 무엇입니까.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  넷플렉스

미국의 어두운 현실을 문학적 은유로 담아낸 원작 소설을  텍스트로 영상화시키는 과정은
영화가 텍스트의 의미를 어떻게 영상으로 전달하느냐에 따라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 낸다.

음  이영화는 어떤 장르일까?
스릴러. 르와르. 잔혹범죄극.

아니면 조금 색다른 히어로물?


스파이더맨의 '톰 홀랜드'와 트와일라잇의 '로버트 패틴슨'의 만남!
어리숙한 톰 홀랜드는 온데간데없고
만년 청순남 로버트 패틴슨은
완벽한  속물의 파렴치범으로 변신
화려한 배우들의 이미지 변신에도
꽤 성공적이다.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라는 다소 불편한 내용의 이 영화는 우리가 가진 악의 평범성을
지나 악의 보편성을 느끼게 한다.


 인연이라는 꼬리에 꼬리 무는 인간사에서 혈연과 악연들이 서로 얽히고 썩여서 악은 대물림 되고 되풀이된다.

신을 믿는다는 건 나를 맏들어준 창조주에 대한 감사보다는
그저 내가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살아가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다.
십자가의 무게를 버티고 살기에는 인간은 너무나 나약하다.

이영화는 2차 대전 이후의 5,60년대의 미국의 풍요로운 현실 뒤의 어두운 면을 다루고 있다.
전장에서 십자가에 피부가 벗겨진 전우를 매단 광경을 목도하고, 그 고통을 해방시키기 위해 자신의 총으로  방아쇠를 당긴. 윌러드는
그 트라우마를 안고서 일상 속으로 돌아온다.
전쟁의 공포를 잊고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하고 행복하고 평범한 삶을 살아간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잊고 지낸 신을 다시 믿고. 가정의 평안을 기도한다.
하지만 그 행복도 잠시 아내는 암에 걸린다.
아내를 살리려는 간절한 믿음이 광신으로 변하면서  어린 아들에게  믿음을 강요하는
폭력을 행사하고  결국에는 이성을 잃으면서
 아들이 기르던 강아지를 신에게  제물로 바치지
만  간절한 기도를  신은 들어주지 않고. 아내는 죽는다. 그는
 절망한 나머지 자살을 선택한다. 아들 아빈을 혼자 남겨두고서......

혼자 남겨진 아빈은 할머니에게 보내진다.
하지만
인생이 그리 순탄해 보이지 않는다.

아빈이 할머니와 함께 살게 된 영화의 배경이 미국 남부의 작은 시골마을이라는 설정이 주는 복선은 그 시대의 시대상을 보여준다. 이 마을의 모테가 된 신앙. 영화 속에는 다양한 방식으로 신을 믿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극단적으로 신을 믿는 성직자와 교인들, 합리적이고 인간적인 사고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신의 존재에 홀릭된 인물들의 비틀린 믿음과 그로 인한 악행을  그대로 보여 준다.

자신의 믿음이 완성되었다는 착각에  아내를 죽이고  다시 아내를 부활시키려고 시도하는  교회 부흥사.  믿음을 이용해 어린 소녀들을 성노리게로 만드는 성직자. 다수결에 의해 선출되어 악의 든든한  보호자가 된 보안관.

그 속에서 어린 아빈이 자신의  선을 지키며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세상은 위험해 보인다.
 또한, 신에 대한 믿음이 아니더라도, 무언가에 대한 잘못된 의지와 믿음은 완전한 파멸로 이끈다는 것을 보여준다.
 
모든 연결고리의 한가운데 있는 주인공 어빈의 탄생 전부터, 어빈이 살인자가 되기까지, 그 한 인물의 형성 과정을 보여주는 것을 하나의 축으로, 어빈을 둘러싼 가깝고도 먼 인물들과 상황들까지 모두 보여준다. 시간의 흐름과, 근거리 지역을 넘나들며 종국에는 겹쳐지는 인물들의 인연까지, 촘촘하게 펼쳐진다.

자신을 지키고 ,사랑하는 이의 복수를 위해

살인을 저지를 수밖에 없는 아빈.
평범한 인간이 악에 대처하는 법은 악은 악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  앞에. 무엇이 악인지 그 구별조차 모호해진다.

살인으로 악을 응징한 소년이 도망치는 여정에서
히치하이킹으로 탄  자동차에서
아지는 졸음과 잠은
평범함으로 돌아온 일상의
악과 이 뒤틀린 채로  찾아온
평온함  뒤의
묘한 위로와 위안을 받았다.

이영화는 종교적 색채가 짙다.
종교가 끼치는 영향이 선이 아닌 악의 상징으로 더 친숙하게 와 닿는다.

당신에게 종교가 무엇입나까?라고 묻는다면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라고 말한다. 꽃다운 나이에 인간을 위해 피 흘린  그 이름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내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신의 아들로 온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라고 주저 없이 말한다. 믿음 아래서 스스로 순교했던 많은 성인들의 피값을 대신해서
나는 살아가고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나의 이런 믿음은 교회라는 이름  아래에서 번번이 작아지고 만다.
믿음보다는 단체의 충성심이 되어버리고 사랑보다는 집단이기주의가 되어버리고,
이웃에 대한 사랑보다는 나 자신과 가족의 안위만을 위한 에고이스트가 되어버리고,
공동체 속으로만 끌어들이는 조건부 사랑이 되어버리고,
세상의 것이라 치부하면서 인간의 아름다운 감정들을 모두 부정하게 만들어버리고,
순종하고 판단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이용해서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목회자들과,
그 목회자를 따르는 광신적 믿음을 보면서,
차별 없는 사랑을 실천 하는 대신  충성심과 돈으로 새로운 계급을 만들어 가는 그들의 계가 하찮게 느껴진다.
공동체 안에서만 진정한 믿음이 있다는 그들의 확신 아래,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 단어가 주는 정답이 불편하다.
그 어떤 공동체에도 속하지 않고 골방에서 기도하다가 지옥애 떨어진다 해도
교회는 다니고 싶지 않다.

믿음은 그 어떤 증거나 희망의 실현.  원하던 것의 충족이 아니다.
신을 믿고 자신의 내면 속에서 변화되는
자신은 만나는 일이다.
마음의 평화안에서 
신에게 모든 것을 내맡기고 순종하면서 사는 삶은 자기 포기가 아닌  깨달음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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