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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끼 Oct 20. 2020

서로 사랑하라

참나


우리에게 내려지는 시련은 다양하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실패를 경험하게 하고,
질병에  걸리기도  하고, 상실의 고통을 겪게도 하고 , 불의의  사고를 당하기도 한다.
이 모든 일들을 통해서 인간은 성숙하고 깨닫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마음의 병을 얻어서 영영 자신을 놓아버리기도 한다. 약물에 의지해서
평생을 살아가기도 한다.

신은 이런 시련을 통해서 인간의 마음 안에 믿음이라는 불씨를 심어주기도 한다.
믿음을 통해서 인간은  두려움에 흔들리는 마음을 붙잡는다.

모든 걸 신에게 내맡기고 평온을 느끼며  스스로 할 수 있다는 자존감을 되찾는다.
그 어떤 믿음은  목숨도 내려놓을 수가 있다.
인간에게 믿음은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하는 절대적인 힘을 만들어낸다.

이런 믿음이 확고해지려면 먼저. 희생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희생이라는 단어는 거창해 보이기도 하지만 아주 간단한 데서 시작한다.
첫째가 자아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자아라고 하는 에고를 스스로 죽이는 것이다.
에고를 죽이면 신성한 참나의 존재가 드러나고 이런 참나는
그때 비로소 믿음 안에 가까워지면서 신을 향해 스스로 낮아지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기도 하고 스스로 해탈이라는 길을 찾기도 한다.

신에게 가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를 버려야 한다.
스스로를 부정해야 한다는 이 말은 어쩌면
참나라는 존재를 발견하고 그 흠 없고 고귀한 존재의 마음으로 신을 바라보아야지만
올바른 믿음 안애서 신을 사랑 할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종교는 믿음을 우선시 하지만

때로 절대적인 신의 존재를 이용하려는 집단 의식이 엿보인다. 그 이면에는  공동체를 늘 우선시하는 이익이 깔려있는 믿음이다.
진정한 신을 만나려면 참나의 상태의  내가 되지 않으면
단지 인간의 욕망만을 채우고 마는
짝사랑으로 끝나버리거나 자기 자신밖에 모르면서 그것 또한 하나님의 뜻이라는 나르시시즘에 빠지는 에고이스트가 되거나, 공동체라는 집단의  인정 욕 구안에서 그  조직의 이익만을  위해  종교를 이용하는 것이다.

우리 안에  주인인 참나가 드러나면 우리는
그 어떤  누군가의 도움 없이도 신을 느끼게 되고 세상의 모든 걸 사랑하게 된다.
 길거리의 풀 한 포기 집안의   벌레 한 마리  조차도. 제소임을 다한 지저분한 걸레 조차도 사랑하게 된다. 신은 이렇듯 자연스럽게 우리 마음 안애 사랑이라는 의미를 심어주셨다.

하지만
예수님이 절대적으로 말씀하시는 사랑이라는 의미의 뜻을   교회는 가르치지만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
부처님이 절대적으로 말씀하시는 자비라는 의미를   사찰에서는  가르치지만 실천하지는 않는다.

공동체를 중요시 여기고 공동체 안애서만 믿음이 있고 사랑이 있다고 가르치며,
어려운 경전과 성경을 공부시키고  그 안애서 결속력을 우선시한다.
물론 그 안에서도 사랑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조건부 사랑에 불과할 뿐이다.

자신을 버리고 신에게 나아가라는 의미는
  먼저 자신에 대한 공부가 먼저 여야 한다.
자신의 무엇을 버릴지 자신의  존재가 허상임을 알아야 한다.

믿음이 강해졌을 때 신에게 나를 온전히 바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에 개 주어진  축복인지 모른다.  나를 만드신 신의 도구로 내가 쓰이는 것 자체가 인간에게는 얼마나 큰
영광인가! 그러면 신은 어떤 일에 나를 도구로 쓰시는가!
거리를 보면 도를 아시니까?부터 예수를 믿으세요. 성불하세요. 라며
모두 믿음으로 무장하고 자신이 믿는 신의 도구로 스스로 사명을 받았다고 나온 사람들이 넘쳐난다. 감히 신의 도구로 선택받았다는 믿음을 가지고서.....

하지만 그들은 공동체의 도구일 뿐이다.   지구 상에 신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신이 말하는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오른빰을 맞으면 왼쪽 빰을 내어주는 사람도
겉옷을 원하면 속옷까지 내어주는 그런 사람은 없다.
그런 사람이 있다 치더라도  바보 취급을 받을 것이다.
또한 그런 사랑은 부담스러울 뿐이다.
믿음과 사랑은 언제나 함께 가야 한다.
하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사랑이라는 의미는 점점 복잡 지고 있다.

하나님이 의미하는 사랑은 너무나 단순하다.
하나님의 의미하는 믿음도 너무나 단순하다.

하지만 공동체의 이익이 우선시 되는 종교는 언제나 하나님을 복잡하게 만든다.
그리고 때로는 나와의 소통을 가로 막을때도 있다. 공동체안에서 믿음이 순수해지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의 이익을 배제하고

타종교에게도 열려있어야 한다.

자신을 아는 일에 게을리 하지 말아야하며

사랑이 먼저 여야 한다.

나와의 진정한 소통이 시작되면
하나님은 언제나 살아서 내 안에 존재한다.
하나님의 존재를 내가 어떻게 누리고 사랑하고
은혜 받을지는 참나가 먼저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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