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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끼 Oct 09. 2020

마음이 나에게 모습을 드러낼 때

나라는 자유

마음을 만났다.
 우주 같은 미지의 세계이고,
 양자역학 같은 혼돈의 세계이며
무안한 상상의 바다지만,

어린아이처럼 단순하고,  순수할 수도 있다.

이러한 마음에 이상이 생기는
마음의 병이라고 이야기하지만
냉정한 의미에서 병이라고 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정상적이라는 기준 자체가 이미  정해놓은  사회적 틀이기 때문이다. 만약 무인도에 혼자 산다면  어떤 행동을 하든 어떤 사유를 하든  이상할 리 마음이 병이라고 할 수도 없다. 병이란 것도 결국은 상대적인 개념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어쩌면 인간이 아픈 건 육체적 고통이 아니라
 아픈 순간조차도 비교당하고 자기 자신을 인정받지 못하고
정상이라는 기준의 범위 밖에서 소외당하는 존재의 부정일 것이다.

고유한 마음의 영역을 인정받지 못하고  치유라는 목적으로
 단순한 메뉴얼 안의 카테고리에 넣고
병을 진단하고  치료를 통해 완치라는 단어를 쓴다는 건  정말 마음 치유하고는 거리가 한참  멀어 보인다.
마음에는 완치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다. 단지 표류하고 흘러갈 뿐이다.
긍정적이고 행복하면 치유가 일어난다고 해서  억지로 그렇게 해 보려고 마음은 노력한다. 어떤 강한 사람들이  이런 치유의 과정을 거치고 건강해졌으니 나도 한번 그렇게 하면 나아지리라는 희망을 가지고서 자신의 고유성을 버린 채로 그 매뉴얼에 자신을 끼워 맞춘다.
하지만  치유는 일어나지 않고 점점 약에 의존하게 된다. 다수에게 적용된 메뉴얼이  나와는 맞지 않을 뿐이다. 나는 훨씬 더 예민하고 감각적인 사람이기에  나와 맞는걸 찾아야한다. 메뉴얼이 없다면 .

그 치유 메뉴얼은 내가 다시 정해야 한다.

살아온 경험에 따라 또 경우의 수처럼 갈래갈래로 나누어지는
마음을 하나의 카테고리 안에 넣을 수는 없다.
  실체도 없고 허상이라는  마음이 이렇게 복잡한 이유는
인간이 만들어놓은 복잡한 사회적 구 조 때문일 것이다.
무인도에 혼자 산다면 무슨 복잡한 마음 구조 생기겠는가!   결국 마음의 병인
불안이나 강박 두려움 등은  무수한 변수

사회라는 세상속에서 끝없이 경쟁하고 살아남기 위해 진화하는 과정에서 생긴  결과물이다.


사회는 비교를 통해 관계가 설정되고 유지 된다. 이런 타인과의 비교가 아닌. 절대적인 위치에서 나를 놓고 스스로 와의 내적 투쟁과 싸움을 거치고 나를 알고 나를 수용 하는 에서 부터 마음의 치유가 시작될 수 있다.

스스로가 무인도에 있어보아야 지만
무엇이 자신을 위한 것인지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된다.

종교는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마음을 언제나 심플하게 다루고 있다.
그저 믿고 따르고 버리면 모든 게 해결된다.
부처는 무아를 통한 해탈을  이야기하고, 예수는 신에 사랑과 복종을 이야기한다.
해탈과 구원은 결국은 죽음 뒤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영생을 바라는 인간의 희망을 이야기한다.  과정은 다르지만 결과는 같다. 살아생전은 마음의 평화요.
죽어서는 영원한 안식처이다. 진리는 간단하고 심플하다.
하지만
이런 세상의  진리가 나에게 먹히지 않는 이유는  너무 간단하고 명료하고 쉽기 때문이다.  이미 복잡해진 마음은 그것을 이해하기 힘들다.

많은 것을 포기하고 내려놓고 비워내지 않으면 불가능해진 것이다.

무엇을 내려놓을지 무엇을 비울지
내가 곧 마음의 주인이고 주체이지만
나는 나를 모른다.
내가 살아온 복잡한 세계를 알지 못한다.
왜냐면 세상의 매뉴얼대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알아야 나의 세계를 변형시킬 수가 있다.
나를 알기 위해서는 마음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타인의 인생이 아닌 내 인생을 살아야 한다.

그렇게 내가 나를 치유할 수 있는
나에 대해 한발 다가가야 한다.
세상의 즐거움이 아닌 나의 즐거움을
찾아내고 나만의 슬픔도 만나야 하고
고독도 만나야 하고
고통도 만나야 한다.

그렇게 나를 알면
조금씩 심플해지고 가벼워지는
마음 안에서 나를 덜어낼 수가 있고.
혼자 맞이하는 질병과  몸의 고통 속에서도
마음이 나마 평온할 수 있다.

마음은 나를 인정하고  내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그때 비로써 나에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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