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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끼 Dec 29. 2020

타인의 고통2

고통

모네 그림

삶에 있어 최악의 순간을 경험하고 나면, 그 경험은 트라우마가 되기도 하지만
또 일정 기간이 지나면 든든한 기둥이 되어
웬만한 어려운 일이 닥쳐도 그때의 고통을 생각해 볼 때 지금의 시련은 콧노래 처럼느껴 지기도 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들은 언제나 서로 비교당하고 그 경험치가 축적되어서
삶의 고단한 시기는 변화한다.  
그때  죽음의 문턱에서 헤매던 때를 떠올리면서 지금의 고통은  산들바람이 된다.


하지만 자신의 그런 경험이 타인들을 바라보는 잣대가 되지 말아야 하는데
가끔은 그런 오류를 범할 때가 있다.
내가 경험했던 그 수난의 시간을 강조하면서 너의 고통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야 하는 식으로 타인들을 재단하는 일이다.
달관한듯한 자세로 타인의 고통을 하찮게 취급해버리는 오만함이 타인의 고통을
더 헤집어 놓는다.

손에 가시가 하나만 박혀도 아픈 법이고 지금 내가 겪는 고통은 비교 우위를 따질 수가 없는데 그 고통을 의지박약쯤으로 취급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세상의 모든 고통은 주관적이다. 객관적일 수가 없다.
또한 나의 지극히 주관적인 고통 또한 너무 객관화시켜서 볼 필요도 없다.
내 고통은 위로받아야 하고.
소리 내서 울어야 한다.
그렇게 말로 된 고통만이 긍정할 수 있고 치유되어진다.


타인이 작은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다면 그 고통을 비교해서 바라보아서는  안된다. 비교해서 평가할 사람은 자기 자신뿐이지   타인의 고통의 강도를 자로 잴 수는 없는 것이다. 나의 고통의 경험치를 가지고 위로는 해줄 수 있지만  상대의 고통을
깎아내려서는 안 된다.  

구청에서 민원업무를 처리하고 있는 지인은 사람들에게서 받는 폭언에 늘 마음의 상처를 입으며
마음이 소진된다고 종종  고통을 나에게 하소연한다.
그녀의 하소연을 들으면서 나 또한 " 네가 호강에 받쳤구나 그게 무슨 고통이니
세상에는 더한 일도 얼마나 많은데 "라고 은근 속으로 성화를 내는 나를 발견한다.

너의 고통이 나에게는 그저 푸념으로 느껴지는 순간을 경험할 때마다
사람들의 고통은 얼마나 주관적인가 하는 생각을 한다.
생사를 오가는 고통만 고통이 아니거늘...... 나 또한 고통에 있어 차별이 심한 편이고
나의 고통의 경험치를 내세우며 그녀의  고통을 하찮게 여기고  있었다.

한 가지 이해하기 힘든  점은  그녀에게
고통을 가하고, 폭언을 서슴지 않는 대상 중에는  의외로  인생의 쓴맛 단맛의
깊이를 꿰뚫었다고 여겨지는  노인들이 많다는  말에 조금 놀랐다. 인지 능력의
저하에 따른 문제 때문만은 아니 었다.
말이 통하고 안 통하는 소통의 문제를 넘어서
습관의 반복적 행동 양상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에 너무 치중하다 보면
고통의 경험치를 내세우며 자신만을 우선시하게 된다. 잠깐의 기다림도 참지 못하고.
원칙이 자신만이 불리하게 적용된다고  부당함을 호소한다.
남에게 상처를 주는지도 모르면서
폭언으로  자신을 내세우면서 상대에게 언어폭력을 가한다.

어쩌면 많은 고통을 건너온 경험치가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지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때로는  자신의 고통에 너무 집착 한  나머지 타인들의  작은 고통에 대해 둔감해지는 경우도 될 수 있다.
그래서 아무런 배려 없이 말을 함부로 하고 상처 주면서도   그 고통의 강도는 전혀 모르고 또 아무런 느낌이 없는 건지도.....

 특히 경험이 많은 어른이나 노인들은 그래서 타인들의 고통에  더 둔감하고 자신의 경험이 공감하는 능력을 길러주기보다는
자신의 영웅담이 되어버리는 건지도... 누군가 힘들다고 할 때. 고작 그깐 고통을 가지고 힘들다고 내 앞에서
죽는시늉을 하느냐는 오만한 태도를 보일 수도 있다.

나의 고통의 경험치를
 나에 대한 연민이나 우월감보다는.
타인을 이해하고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는데
더 쓰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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