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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끼 Dec 30. 2020

오늘 내가 쓰고 있는 가면은 몇 개 일까?

가면


직장이라는 공동체는 이익과 상하 위계질서라는 견고한 틀 안에서 굴러간다.
고용인과 피고용인. 지배자와 피지배자들 간의 관계가 일상의 큰 틀이다.

나에게 계급에 맞는 권한과 위치는  나를 보호하기도 하고 나를 굴복시키기도 한다.
국가는 교육이라는 시스템을 이용해 그 틀 속에 순응하면서 살아가는 법을 가르친다.
그렇게 커 가면서 나의 자리는 수시로 바뀌어 갔다.
학생이라는 자리, 자식이라는 자리, 부모라는 자리.
말단사원이라는 자리, 사장이라는 자리... 권력이라는 자리 , 명예라는 자리...
싸워야 하는 자리, 나서지 말아야 하는 자리, 침묵해야만 하는 자리....

공동체라는 공간은 정해진 자리를 이탈해서는 안된다.
조화와 균형이란 그 자리에 걸맞은 행동양식을 만들어 낸다.
결국 그 행동양식에 맞는 새로운 형태의 내가 탄생한다.
그 새로운 나에게는  그 자리에 맞게 새로운 가면을 하나둘씩 만들어 간다.
관계가 바뀔 때마다 수없이 많은 형태의 가면들이 버려지고 또 씌워진다.

"그 자리에 맞는 가면을 쓰고 연극하듯이 살면 진짜 나를 훼손하지는 않아,
인생은 연극일
뿐이야"

우리는 가면을 쓰고 웃는다. 미소 짓는다. 온화한 표정을 짓는다.
그렇게 해서 갈등과 싸움을 피해 가고 불의를 외면한다.
결과가 뻔히 보이는 싸움을 정의와 선의라는 이름으로 뒤집기란 쉽지 않고  뒤집고 난 후의 후폭풍 또한 만만치가 않을뿐더러   지배와 피지배가 존재하는 한 싸움이라는 저항 속에는 늘 혁명이라는  피의  참사가  반복되어 왔지만.
진정한 유토피아는 만들어질 수가 없었다.

상하관계에서 길들여져 순응하는 법은 몸이 알아서 한다.
본능적으로 고개 숙이는 법을 알고  이해관계에는 정확한 계산을 하고  그저 당하고 모른 척하면서 감정을 잘 썩지 않으면 불필요한 싸움은 피할 수 있었다. 어차피 이해관계로 만난 집단 안에서  이익이 되느냐 아니냐 라는 문제만
남는다. 침묵이라는 가면은 늘 언제나 이익을 대변한다.

 마음이 요동치고 있어도  가면 뒤에 숨어서 가만히 있으면 된다.
내 감정을 생매장시키고 고개만 숙이면 된다.
굴욕이라는 가면을 잘 쓰면  평정심과 마음의 평온까지 유지한다.
내가 가면인지 가면이 나인지... 모르는 체 일상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면 가면을 벗는다.

아무것도 눈치 볼 게 없는 나의 제국 같은 집에 오면  가면을 벗어던지고  그제야 편안하게 민낯을 하고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물건을 사면서  편의점 점원에게 조차 지어 보였던 나의
 온화한 가면은 온데간데없고 집에서의 얼굴은 경직된다.
어느 순간  가면에 익숙해진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순응은 조건 반사적으로 순응이 잘 되었지만 , 민낯의 상황이 되면
감정이 널뛰기하듯 제어가 안된다.
가족들은 작은 부딪힘 하나조차도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가면이 사라진  민낯에  에고라는 망나니 같은 녀석이 날뛰기 사작하면
이제는 에고들끼리의 새로운  감정의 이해관계가 성립한다.

 감정적으로 또다시 가면을 쓰고 배려하고 생각해야지만 화목이라는 그럴 싸한 가정의 밑그림이 만들어진다.

결국은 가정의 평화를 위해 다시 가면을 쓴다.
가정에서의 가면은 더 섬세한 걸 골라야 한다.  길들여진 내가 아닌
한 꺼풀 벗겨진 자유로운 나를 드러낼 자연스러운 가면을
쓸 시간이다.

가면을 완전히 벗는 시간은 결국  이래 저래 혼자 있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다.
 혼자만의 시간에 민낯을 대할 수 있는 시간은 사유하는 시간이다.
난 단순해서 사유 같은 복잡한 거 딱 질색이야  라고 하는 사람은 tv나 온갖 미디어 속은
가면 속의 무도회를 즐긴다. 그사이 더 견고한 가면이 마음속에까지 씌워진다.
그 지루한 가면을 혼자 있는 시간조차도
자신인 양 평생 쓰면서 꼭두각시가 된다.

혼자 있는 시간 가면을 완전히 벗고 나를 온전히 마주 할 수 있는가!

이 또한 쉽지 않은 일이다. 사유하는 시간조차도 좀 더 멋진 나를 보려고
허세를 부리고 진짜 내 모습은   나의 진짜  모습을 거부한다.

자기 성찰을 한다는 것은  가면 속의 나를 한꺼번에
 만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너무 많은 가면이 있어,
한 번도 진짜 민닟을 만나지 못한다.


우리는 너무 오랜 시간 자신의 민낯을 모른 체
여러 가면을 겹쳐 쓰고 살았다.

겹쳐 쓴 가면이 너무나 견고해지면
무서운 일이 벌어진다.

진짜 자신의 모습이라고 굳게 믿은 나머지 다른 가면을 쓸 줄도 모르고
자신이 가면인지 민낯 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돼 버린다.

하나의 가면만을 쓰고 사는 사람의 삶이 행복할까?
천 개의 가면을 쓰고 사는 사람들의 삶이 행복할까?

그런 질문은 아무 의미가 없다.
자신의 민낯을 정확히  안다면 가면의 개수 따위  중요하지 않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단 중요한 것은  여러 개를 겹쳐 쓰지 말고 한 번에 하나의 가면을 써야 한다.

그래야만 민낯으로 돌아오는데 시간이 덜 걸린다.

그럼 가면을  벗어던진 민낯은 어떤 모습일까?
과연 우리는 민낯으로만 살아갈 수 있기는 한 걸까?
언제부턴가 가면 벗는 법 조차 잊어버린 사람들은
 평생 단 한 번도 자신의 민낯을 보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다.

평생  가면만 써 온 사람이 어떻게 민낯을 만날 수 있을까?
 한 꺼풀 벗기고 또  자꾸 벗기면 민낯을 만날 수 있을까?
민낯은 가면을 벗긴다고 만나는 그런 얼굴이 아니다.

가면을 벗기면 벗길수록 없어지는 얼굴이 진짜 민낯이다.
하나둘씩 없어지는 얼굴.  그렇게 없어진 얼굴 위에 가면을 썼을 때는 몰랐던
나의 진짜 얼굴인 욕망을 만난다.  그때 그 욕망에 자꾸 질문이라는 걸 하게 된다.
그 욕망에 말을 걸면 그 욕망이 실은 내 것이 아니고 그 무엇에 대한 집착이고
과시며  때로 욕심이며 나를 행복하게 해 줄  그 어떤 것도 없다는 걸
하나씩 알게 되고 민낯은 점점 형태가 없어져서 나라고 규정할 만한 자아가 없어지고
두리뭉실 같은 형태를  띤 자연의 형상을 닮아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럴 때 나의 고유성은 그저 존재한다는 것 만으로만  증명된다.
나의 민낯은 나의 고유성이다.
하지만 가면도 벗고 민낯의 형태도 모호한 이런 존재의 느낌은
혼자만 감당해야 할 미지의 영역이라서. 밖으로 드러날 때는
현실 속에서는 그 어떤 형태로도 이해받을 수 없다.

민낯 속에서도 가면 속에서도  사람들 속에서도 민낯을 벗은 진짜 모습을 드러 낸다면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소외감을 줄 것이고, 스스로를 부정당할 수 있으며  민낯으로 실천하는 그 이타성은 존중받을 수 없다.
현실 관계 속에서 이런 모습은 결코 환영받을 수 없는 존재의 한 형태이다.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서로  함께 무수한 가면을 쓰고 함께 조화를 이루어야
우리의  존재는 받아들여진다.  혼자만의 시간 안에서 누리는 민낯은  철저한 혼자만의
놀이 같은 것이다. 니체가 만들어 낸  자라투스트라라는 초인이 현대사회에서 있을 곳은
정신병원이 안성맞춤 일 것이다.  인도의 수행자는 인도에 있어야 하고,
초인은 스스로를 완전히 숨겨야 초인으로 존재할 수 있다. 초인이 초인으로 드러나는 순간은   정신병원이 딱 맞는 장소이다.  이런 초인을 사람들은 반기지 않는다.    결국 똥파리들이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고 달려들 것이다. 결국 완전한 초인은 박해당하고 죽는다. 예수가 못 박혔던 이유도 스스로 초인이라고 나섰기 때문이다.

신조차도  자신의 권능을 세상에 보이지 않는데
 초인 따위가 자신의 민낯을 아무렇게나 내보인다는 건 얼마나 위험하고 신을 거스르는 행위인가!
결국 모든 인간의 완전한 이타성과
해탈은 밖으로 보이지 않게 완전한 자신의 것으로 끝이 나야 완성된다.
그것이 하늘의 뜻이고 그 뜻을 거스르는 것은 죽음과 맞 바꾸어야 한다.

 진정한 깨달음은  자신과 신만이 아는 사실!
하지만 민낯을 만나는 일은 자신의 신성과 만나는 일이다.
아주 잠깐의 시간 만이라도 자신의 민낯을 만날 수 있다면
인간은 그 자체만으로 모든 걸 다 가진 존재가 된다.

그래서 인간은 신비로운 존재이다.
그것을 깨달은 자들은 세상 곳곳에 진정한 초인으로 고고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거짓의 가면을 쓰고 자신의 모습을 숨긴  미소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우리의 영혼을 흔드는 가면은
민낯 위에 투명하게 쓰인 하나의 진정성 있는  가면이다.
그 가면 뒤에 민낯은 초인의 강함일 수도 있지만
연약함이라는 아주 작은  위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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