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선행은 찌질하다

알곡.

by 토끼


"선배님 저 헤드폰을 두고 온 것 같아요. 그 식당에요. 시간 되면 좀
챙겨 놔 주세요."

그렇게 그녀는 공무원 시험을 고향에서 보겠다며 대전으로 떠났다.

그리고 반년이 되었다.

그녀의 분홍색 헤드폰은 아직도 내 책상에 우두커니 있다.
난 저 헤드폰을 돌려주지 않을 것이다.


"넌 왜 확률적으로도 낮은 공무원 시험을 보려는 건데... 서울에서 한번 떨어졌으면 됐지. 간당간당 떨어진 것도 아니고 커트라인에서 훨씬 못 미쳤다면서 왜 공무원 시험을 보겠다는 건지 난 좀 이해가 안 되네.

그것도 어쩌면 도박 같은 거야! 뭔가 현실 도피 같은 거! 공부하고 있는 동안은 꿈꿀 수 있으니까! 하지만 너도 알잖아 네가 시험에 붙을 확률이 낮다는거...
. 차라리 가장 현실적인 네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차근차근 배워서 하나씩 성실하게 채워가는 게 훨씬 낫지 않을까!!"

그녀는 스스로 시험에 붙지 않을 거라는 걸 고백했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고 싶어서라고 했다.

엄마뻘 되는 내가 선배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녀에게 쏟아내는 말들은 끊임없이 그녀에 대한 반문과 무기력을 느끼며 그녀를 만나면 나도 모르게 서서히 꼰대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마지막이라는 다짐을 해 보았다.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그녀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나의 이야기다.

일을 배우겠다고 온 이제 20대 후반인 그녀가 우연히 내 지갑을 화장실에서 찾아주면서 우리의 인연인지 악연인지는 시작되었다.

좁쌀 같은 물집이 얼굴에 도드라진 그녀는 6개월 화장품을 잘못 쓴 이후로 얼굴에 물집이 잡히고 전체로 퍼졌다며 무심하게 이야기했다. 이제 막 트라우마라는 어둠의 장막을 헤치고 나온 하루하루가 감사한 나에게 그녀는 운명 같은 존재였다.

신이 보낸 다리가 부러진 작은 비둘기 한 마리.


그녀는 대학생인 동생과 둘이 쪼들린 생활을 하고 있었고 새로 입사해서 일을 배우는 중이었다.


노력은 했지만 재능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반짝이는 눈과 호기심 어린 질문들로 내 마음의 열정에 불을 지폈다. 물집은 병원을 다녀도 나을 기미가 없었고 모든 사람의 시선을 견디며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위해 난 뭔가를 해야 했다.

나와 관련이 없는 부서였지만 가끔씩 회사 내에서 얼굴이 마주치는 그녀를 위해 나로서는 큰 거금을 그녀에게 선뜬 쥐어주면서 다 잘될 거야 라며 그냥 쿨하게 쓰라면서 멋지게 퇴장하고 싶었는데....

사람 마음이 츠암 그렇지가 못했다. 밥 대신 빵을 먹는 그녀에게 도시락을 사다 먹이고
김치를 담가 가방 깊숙이 넣어주면서. 그녀에게 집착 한 건 어쩌면 나였는지 모른다.

그녀는 한 번도 나에게 무언가를 해달라고 한 적이 없었다. 혼자 좋아서 한일이었다.

거기서 끝냈어야 했었다. 그녀는 무심한 사람이었다.

무심한 듯 나의 모든 알곡들을 다 빼먹으면서도 한 번도 고맙다는 말도 밥을 산적도 차를 산적도 없었다.

매번 도시락을 두 개 싸오기가
힘들어 밥만이라도 싸오라고
"난 현미로만 밥을 해서 먹는데
너 입에 안 맞을 거야!
흰밥은 네가 싸와라!"

라고 말해도 눈치 없는 이 아이는

"아뇨 저 현미도 먹을 수 있어요"

난 이 아이에게 코가 끼었다.

하는 시늉만 하고 끝낼 생각이었는데.

하지만 나의 선행은 날개를 달고 나에게 영광의 아우라가 멋지게 드리워져야 했다.

한번 시작한 나의 선행이 빛나기 위해서는 그 모든 일방적인 나의 행위를 거룩함으로 빛나게 해야 했다.

그렇게 나중에는 이게 아닌데 라면서
내 선행은 억지 춘향이 연극을 하면서

밑 빠진 독만 열심히 채웠다.

하지만 그녀는 1년도 채우지 못하고 퇴사했다.

이유는 재능 없는 일에 매달리기보다는 현실적인 일을 택하기 위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해야겠다는 대안이었다.

그녀의 입술포진은 여전히 그대로였고, 더한층 왜소해진 모습으로 그녀는 마지막 인사를 했다.

그날도 나는 몸보신이라도 해야 한다며 고깃집에 그녀를 데려가서 먹였다.

나는 그녀에게는 호구였다. 나의 선행이 아름답게 마무리되어야 하니까!
행여라도 흠집이 나면 나의 선행은 허튼짓이 돼 버리니까!

내가 저지른 선행의 늪은 깊었다.


그녀는 퇴사 후 가끔 카톡으로 안부를 보내왔고 다행히 내 머릿속에서도 나의 선행은 잊혀 갔다.


그리고 그 일은 말끔히 끝났어야 했다.
난 그때 참 좋은 사람이었지라고.


마지막으로 그녀가 나에게 전화 온 그날!
그 지질했던 마음에 정점을 찍었던 순간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선배님 저 오늘 서울을 떠나요. 그래서 꼭 선배님을 만나서 전해드릴 게 있어요."
그녀의 전화를 들은 내 심장은 그때 심하게 요동쳤다. 내 돈!
내선행이 드디어 찬란한 빛을 보는구나!
드디어 내선행의 비둘기는 내뿜으로 다시 돌아 도는구나!
할렐루야.

점심을 거하게 먹었다.
돈도 받을 텐데 마지막으로
마음껏 그녀를 위해 쓰고 싶었다.

차를 마시고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억지 춘향이 아닌 자애로운 선배. 현명한 인생 조언자로서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해 냈다.

드디어 작별의 순간이 왔다.
안양천을 한 바퀴 돌고
포옹을 하는 마지막 순간

그동안 고마웠어요."
그녀의 주머니는 열리지 않았다.

그 한마디뿐이었다.

내가 바라던
선배님 그동안 잘 썼어요.
그녀의 품에 있는 돈봉투는
비둘기가 물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날아간다.

그녀는 늘 알차게 나의 알곡을 빼먹는다.
악어에게 붙은 악어새처럼..;

그리고 분홍색 헤드폰을 남기고 갔다.
내 지질한 선행의 기억만을 남기고.....

"계집아이야 이제 잘살아야 돼!"

잊혀서 마음 편한 시간!

3년이 지난 오늘 그녀에게서
문자가 왔다.

"저 결혼해요."


구원은 선행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오스카는 말한다. 어떤 선행은 허영심에서 비롯되기도 하고, 새로운 기분을 느끼고 싶은 욕망일 수도 있고, 우리들로 하여금 자신보다 더 멋진 연기를 하게 만드는 극적 정열과 혼동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왼손이 모르게 행하는 오른손의 선행을 원하지 않는다. 안타깝지만 이게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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