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똥 수다를 싼다.

똥 이야기

by 토끼


선데이 타임스 지에서 스탈린의 아들 아이코프 가 어떻게 죽었는가를 읽어
알았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포로로서 영국 장교들과 함께 독일
포로수용소에 감금되었다. 그들에게는 하나의 공동 변소가 있었다.
스탈린의 아들은 변을 볼 때마다 늘 변소를 더럽혀놓았다. 비록 그 당시
세상에 서 가장 권력 있는 사람의 자식의 똥이 문제 되었지만, 똥이 발라져
더럽혀진 변 소를 보아야만 한다는 것은 영국군 장교들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들은 그를 나무랐다. 그는 모욕을 당했다. 그들은 그들의
질책을 번번이 되풀이하여 그가 변소 청소를 하도록 강요했다. 그는
화가 나 다투었고 그들과 치고받으며 주 먹 싸움까지 했다. 결국 그는
수용소 소장과의 접견을 청했다. 그는 소장이 자기 들 다툼을 해결해 줄
것을 바랐다. 거만한 독일 소장은 하지만 똥에 대해 말하 기를 거부했다.

스탈린의 아들은 이 굴욕을 참을 수가 없었다. 거친 러시아 욕설을
하늘에다 외치면서 그는 수용소 주위의 담장을 이루고 있는, 전기가
흐르고 있는 전선을 행해 달려갔다. 그는 철조망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철조망에서 숨을 거두었다. 거기에 매달려있는 그의 육체는 다시는 영국인 변소를 더럽히지 않을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중에서~~~~~~~



영국인들은 세상에서 가장 권세 있는 자라 고해도 그들의 변소를 똥투성이로 만드는 사람을 용납할 수 없었다. 스탈리의 아들은 자신을 비난한 그 모욕을 참을 수 없었다.

1년 전 똥에 관한 충격이적고 비극적인 재앙의 현장이 떠올랐다.

저녁 무렵 퇴근길 개찰구를 통과해서 나오는데.
쾌쾌한 냄새가 참기름 냄새처럼 퍼졌다.
자연스레 코를 킁킁거리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그때 시야에 들어온 한 노인이 어기적 거리면서 뒷모습으로 걷고 있었다.
지하철 역사 안은 노인이 흘리는 오물로 혼란 그 자체였다.
역겨운 냄새가 진동했고. 모두 공포 아닌 공포에 시선을 피하고 몸을 피했다.

누군가는 코를 틀어 막고 구경하고 있었고 또 누군가는 도망갔다. 신고를 해야 하는 거 아니냐며 수군대기 시작했고. 빠른 걸음으로 마치 재난현장을 빠져나가듯이 사람들은 빠져나갔다.
할아버지는 괴로운 듯 천천히 걷고 있었다. 바닥에는 물똥의 흔적들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꼬리처럼 처럼 흔적을 남겼다
치매를 앓고 계신 건지 , 잠깐 실수를 하신 건지는
모르지만 분명 지금의 사태를 인지하고 계신다는 건
표정을 보아 알 수 있었다,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은데 걸음은 느리기만 하니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주저앉기라도 하면 더 큰 웃음거리가 될게 뻔했다.
할아버지가 계단 위로 사라지고
지하철 안은 오물의 흔적으로 혼란스러웠다.
사람들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오던 길을 돌아갔다.
잠깐 스친 할아버지의 표정이 기억나지 않았다.
바지 아래로
흔근하게 적셔진 오물만이 머릿속에
떠나지를 않았다. 할아버지는 그 후 무사히 집에 가는 동안
똥 퍼레이드를 하셨을 것이다. 지금쯤 잘 지내고 계셔야 하는데......

유태인 수용소에는 화장실이 없었다.
오물이 뒤범벅된 곳에서 먹고 자는 유대인들을 간수들은
유태인을 짐승 취급했다.

간수들이 유태인들을 죽이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은 이유는
오물 속에서 뒹구는 그들이 개 돼지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람이 배설물과 함께 뒤범벅이 되면
인간은 스스로든 타의든 간에 존엄성을 상실한다.

수학여행을 가던 고속버스 안에서 중학생 여자아이가 배가 아파 고통을 호소했다.
고속버스 기사는 위험하다고 버스를 멈출 수없다고 거부하였고 , 담임교사는 아이들에게 시선을 돌리게 한 뒤 버스 뒤에서 혼자 배설을 하게 했다.
소녀는 그날의 그 사건이 트라우마가 된다.
치욕스러운 그 시간의 기억을 안고 지내던 소녀는 결국 자살하고 만다.

인간에게 치욕이란
자신의 엉덩이를 드러내는 일이 아니라.
매일 아침 너무나 당연하게
시원하게 싸는 배설물을
타인에게 들키는 일이 치욕이다.

매일 아침 내 몸에서 빠져나가는 오물은 내 눈으로 확인되기 전
향기만을 남기고 버튼을 누르면 물과 함께 사라진다.
이슬만 먹고살 것 같은 아름답고 순수한 미인도 똥을 싼다.
피똥을 쌀 때도 있다. 아마도 자신의 똥을 황홀하게 바라보며 냄새를 맡는
엽기적인 행동도 할 수 있다. 화장실 안 그 풍경은 숨겨진 똥의 세계이다.
하지만 이 숨겨진 세계가 밖으로 드러나면 재앙이 되고 똥만도 못한 존재가 된다.
똥을 누는 행위가 타인들에게 보이는 게
어째서 이렇게 인간들 사이에 치욕스럽고 혐오스러운 행위가 되었을까?

거리에는 강아지들이 주인과 산책을 하면서 엉덩짝을 들이대고 똥을 싼다.
주인들은 흐뭇하게 똥 싸는 광경을 바라본다.
그들은 이제 누구나 강아지 똥 치우는 일을 숙명으로 안다.
사료만 먹는 강아지똥은 치우기도 편하다.
동물들, 사료는 동물들을 위한 먹이가 아니다.
배설물을 치우기 쉽게 하기 위한 인간들의 이기심이다.
물똥을 싸면 치우기 힘들기 때문에 사료를 먹이고 단단한 똥을 싸게 만든다.

길고양이들은 아무거나 먹고 물똥이든 바나나든 맘대로 싼다.
하지만 고양이는 영악하다.
흙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자신이 배설할 곳을 찾는다.
흙으로 덮어 표시가 안 나게 귀신같이 마무리한다.
만약 길고양이들이 길바닥에 똥을 갈기고 다녔다면 인간들은 거리의 환경오염의 주범들인 고양이들 씨를 말렸을 것이다.
길고양이들은 이렇게 자신들의 오물을 보이지 않게 처리함으로써 인간들 사이에서
당당하게 존재의 증명을 인정받아 인간과 동등하게
도심 한가운데를 활보하며 다닌다.

푸세식 화장실이던 과거에는 똥은 이처럼 혐오스럽지 않았다.
구더기들이 버글거리고 똥물이 튀어도 웃고 말았다. 거리 구석에는 똥 무더기가 즐비했었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 환경이 깨끗해 질수록
화장실이 깨끗하면 할수록 배설물은 더 더럽게 변모한다.

인간의 가치는 치매가 오고 벽에 똥을 바르는 그때부터
인간이 아닌 동물이 된다.

인간에게 똥이 허용되는 시기는 간낭쟁이때뿐이다.
우리는 갓난아기의 똥은 더럽다고 여기지 않는다.
왜냐면 무지한 어린아이의 배설이기 때문이다.

똥을 가릴 줄 아는 나이가 된다는 건 오물을 숨겨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짐승들이 배설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는가!

과천 동물원에서 꽃사슴이 배설하는 장면을
철창 너머에서 꽃사슴 엉덩이 밑에 코를 박고 황홀하게 바라본 적이 있다.
동 골동 골 한 경단 같은 똥이 알맹이처럼 똥꼬에서 터져 나오는 그 광경은
똥이 아니라 알을 낳는 장면 같았다.
그 경단은 먹음직스러워서 집에 가져와서 밥상에 올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풀 경단을 만든 이쁜 사슴들이 만든 음식 같았다.

달팽이 똥은 또 어떤가! 당근을 먹으면 당근 알갱이의 똥이 나오고
오이를 먹으면 오이 알갱이가 된다,

동물들의 똥을 더럽다고 여기지 않는 이유는 물론 수분이 적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생존을 위한 순수한 것들을 먹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탐욕을 먹는다. 식탐을 위해 만들어진 사해 진미들을 찾아
황홀한 맛의 음식들을 먹지만 배설물들은 끔찍하고 더럽다.

인간의 먹거리는 점점 진화한다. 육해공 모든 먹거리가 인간들의
욕구를 충족시킨다. 하지만 이런 잡식은
세포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위장들을 오염시킨다.

동물들의 배설물에 관리하기 위해 사료라는 편리한 음식물을 만들었듯이
미래에는 인간이 인간의 배설물을 관리하기 위해
또는 먹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알약 하나로
식사가 대체될지 모른다. 무엇을 먹는다는 행위 자체가
미개한 인간의 모습이 될지 모른다.

미래에는
인간들의 배설물이 차별받지 않고
배설하는 행위가 들켜도 치욕을 느끼지 않는 그런 사고의 전환이 올 날이 있을까?

밀란 쿤데라는 똥을
미학적 이상의 키치라고 불렀다.
"키치란 본질적으로 똥에 대한 절대적 부정이다."

" 문자적 의미나 상징적 의미에서 그렇다. 키치는 자신의 시야에서 인간 존재가 지닌 것 중 본질적으로 수락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배제한다". 고 했다.

아름다운 여인이 똥 누는 모습을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치장한 여인의 아름다운 모습은 눈에 보이는 거짓이고
보이지 않는 진실은 바로 몸속 창자에 있다.
신이 자신의 형상대로 나를 만드셨다면 신도 창자가 있었을까!
신은 먹지 않아도 살 수 있으니 대장을 통해 콧바람 방귀 아름다운 소리가 나올까?
신들도 그 방귀 소리가 흉측 하다며 몰래 혼자 숨어서 뀌고 있는 건 아닐까?


똥이 절실히 마려운 적을 기억해 보라!


인생의 희로애락 기쁨과 슬픔 평온함과 고요함 무념무상 이 모든 걸
한방애 날려버리는 순간이 언제인 줄 아는가!
뒷산을 산책하다 똥이 마려운 순간이다.
1시간 코스의 산행을 하면서 초입부터 마려웠던 변의를 무시하고 갔다가
1시간 후쯤의 절정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 초인적인 힘으로 똥을 참으면서 느끼는 그 순간을 경험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알 것이다. 그것은 고통이 아니다.
삶의 정수며 절정이다.
그 괴로움 속에는 허무가 있을 리 없다. 삶의 진액 같은 의지력과 절실함 그리고 간절함이 뒤 썩인 그 순간을.....
집에까지 갈 수 없는 절박함에 산아래 카페로 뛰어 들어간 그곳 화장실에는
전신 거울이 있었다.
똥 쌀 때의 그 쾌감을 뭐라 설명할 수 있을까! 똥을 쌀 때의 내 진지하고 희극적인
얼굴이 바로 내 창자를 통해 빠져나가는 똥덩어리와 함께
보이지 않는 완전한 진실이다.

그 모든 일 끝나고 옷을 입고 앉은 채로 거울 본다.

다시 보이는 거짓은 날 향해 웃는다.
괴로워도 나는 똥을 싸고
행복해도 나는 똥을 싼다.
기쁨도 슬픔도 괴로움도 행복도 결국은 똥을 이길 수는 없다.
똥덩어리는 내 삶의 희열 덩어리구나.
똥덩어리는 순수한 삶의 결정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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