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이렇게 만든 건 당신이야.

자유

by 토끼

당신이 어느 날 입술이 파르르 떨리면서
소리쳤다.

"날 이렇게 만든 건 당신이야!
너와 만나서 난 제대로 되는게 하나도 없어!"

우리가 싸웠던 많은 시간.

많은 말들이 서로를 핥퀴고 물어 뜯었지만
잠깐 화를 삭히고 나면 이내 밀려오는
후회들로 다시 사랑이라는 짠한 감정의
속살이 올라왔지만

날 이렇게 만든 건 당신이야!
라는 그 말만은 살을 파고 뼈에 박혀
몸 어딘가에 남아 비 오는 어느 날이면
신경통처럼 아팠다.

당신은 자꾸만 전에 볼 수없던 표정을 하고
나를 본다.

당신은 이제 내 앞에서 웃지 않는다.
그 설레는 청춘이 아름다웠던 미소를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공간만을 차지한 체로
서로의 마음 안으로 깊이 들어가지 못한체
이방인 처럼 함께 살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헤어지지 못한다.
우리의 발아래에는 부부라는 사슬이
서로의 굴레처럼 칭칭 감겨있다.

부부싸움에 취약했던 과거의 나는 늘 싸움을 걸어오는 남편을 피해서
굴을 파고 다녔다. 숨을 수 있으면 꽁꽁 숨어서 말을 아꼈다.
왜냐면 진짜 하고 싶은 말들은 꼭꼭 숨겨야 했다.
정말 화가 나서 그 말을 뱉고 나면 이 사람이 얼마나 상처를 받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침묵이 답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것은 나만의 착각이었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글을 쓰고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가지면서 변하는 건 자신의 내면만이 아니다.
싸움의 기술이라는 것도 조금씩 는다.
예전에는 조용히 넘어갈 일이었는데.... 머리에 뭐가 들어가기 시작하고
팽팽 언어들이 돌아가기 시작하니... 내 마음이 외치고 싶어 하는지
감정의 골을 걷어내고 어느 책에서 읽었던 구절들
누군가와 했던 이야기들 사유의 잔재들이
방패가 되고 창살이 되어 무사의 갑옷처럼 느껴지더니
싸우면 싸울수록
자꾸만 이성적이 돼 간다.

부부 싸움의 형태도 변해 간다.
감정을 실지 않으니 차근차근 논쟁으로 시작되는 말싸움이 많아진다.

부부 싸움도 레퍼토리가 있다.
어느 부분에 어떤 단어가 나올지 패턴도 있다.

이제 이 시점에서 우리 친정 이야기를 들먹일 때가 됐는데..
싶으면 어김없이 그때 장모님이 말이야 하고 튀어나온다.
그렇게 같은 말들의 반복이 부부싸움이다.
그렇게 괴거의 싸움들은 패턴만을 반복하면서
어느 한쪽이 백기를 들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미안해
다시는 안 그럴게
화가 나서 한 말이야,
다음부터는 잘할게.
내가 미쳤었나 봐.
날 한 번만 믿어줘.
이런 말들이 오가고

한 나절 반나절
하루 이틀 서로 침묵하다가.
누가 한번 웃어주거나, 말 걸면 풀려버리는 게 결말이었다.

부부 싸움 중에도 이 말만은 절대 하지 않고 봉인한 이유는 딱 하나. 상대가 상처 받을 거라는 이유였다.
봉인의 형벌은 나의 편견만 부추기고 있었다.

마음의 변화는 편견을 깨고 싶어 했다.



마음속에 꽁꽁 숨겨두었던 나의 금기어가 봉인을 풀고
어느 날 치열한 전투에서 툭 입에서 빠져 나와 버렸다.

결혼 20년 만에 마음에서 빠져 나와 자유를 얻어버린 그 말.

난 숨죽여 상대의 반응을 살펴야 했다.
하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상대는 생각 했던 것보다 훨씬 강했다.

내가 약해서 혼자 겁먹었던 것이다.
스스로 상대를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아무 말이나 속 시원하게 다 쏟아내어도 상대는
맷집이 튼튼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마음속에 갇힌 단어들이 자유의 몸이 되자.
부부싸움은 더 이상 피해야 할 두려움도 아니고
상처를 줄까 봐 두려워 날아오는 화살을 다 맞고 있을
필요도 없어졌고.
상대의 마음을 살피면서 칼을 휘두르는 완급조절도
하게 된다.

하지만 너무 이성적이면 말이 칼이 된다.
마음속 금기어들은 자유를 얻어 날개를 달고
날아갔는데.... 더 이성적이고 날카로운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재생산되고 있었던 걸 몰랐다.

서툴고 모자랄 때는 가슴이 찌르는 말을 피하려고
숨어 다녔지만 능숙하다고 자부한 오만함은
상대를 찌르고 있는 줄도 모르고
거침없이 나와서 여유 있는 미소를 짓고 있다.

내가 자만했던 시간
한바탕 놀고 나면 마음은 편해졌지만
자꾸만 침묵의 시간이 길어져 갔다.
부부싸움의 기술 따위는 없다. 싸움은 폐허를 만든다.

이제는 싸움의 기술뿐 아니라
폐허가 된 잔해를 치우는 재건의 기술이 필요하게 되었다.
내가 만들어 놓은 쓰레기를 치우는 일에도
많은 에너지가 필요했다.

자유인이 된 그 이후.
검투사처럼 난 싸움을 한다.

"당신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
당신을 만나서 난 제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

나에게 금기어가 있듯
절대 듣고 싶지 않은 않았던 이 말.
내 심장을 찌르는 이 말.

하지만 나의 맷집도 튼튼해 졌다.


비수가 꽂히고
심장을 찔리고도 웃을 수 있는 건

우리는 아직 싸울 수 있는 서로의 관심과 열정이
우리의 견고한 사랑을 버티게 해주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나의 금기어가 사라진 그 자리..

당신의 금기어가 박혀버린 그 자리.


하지만 상처 입지 않고
다시 새살이 돋는 그 자리...
우리 마음에 담아 두었는 말들이
자유롭게 날아가도록 더 많은 싸움이 필요하다.

우리는 아직 그 아픈 말들만큼 서로를 더 사랑하니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마음 안에 가두어둔 금기어는 상처입힐까 봐 두려운
나의 자비가 아니다.

그건

진실이 두렵기 때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읽혀지지 않는" 나"라는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