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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끼 Jun 06. 2021

물 많은 여자(1편)

남자들의 수다.

"이번 주 수요일 제주도  1박 2일 라운딩 빠지면 안 됩니다. 최 사장.

최 사장 없으면 재미없다 아입니까?

제주 옥돔 매우 큰 놈으로

박사장 친구가 구해 놨다니까 꼭 참석해야 합니다?"


걸걸한 사투리의  김 사장은 확답을 재촉했다.


최형국은 기분 좋은 미소를 띠며. 소파에 몸을 기대며 전화를 받았다.

"걱정 마십시오. 김 사장!

바쁜 일 제쳐놓고 꼭 갑니다. "

납품이 밀려 정신없이 바쁜 최형국이었다.

하지만 요즘 부쩍 자신의 존재감 커진

이 모임에 최형국은 공을 들이고 있었다.


김 사장  박사장  최형국 그리고 하교수 네 사람은

사업차 만나 서로 다른 이해관계로 만났지만 끈끈한  골프 멤버가 되었다.


최형국은 이 모임에  순수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모두 마흔을 넘긴   비슷한 연배였고  어느 정도의 사회적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탄탄한 사회적 배경을 가진 상류층들이었다. 그들은 넘치는 부와 쾌락을  조절할 줄도 알고. 자신의 삶을 절제하면서 사는 고상한 부류들이었다.

남자넷이 모이면 뭔 짓인들 못할 듯싶지만 지금 만나고 있는 이 사내들은  삶의 철학이 있었고 ,  아직 열정적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들과의 대화에는 신변잡기나 가십보다는 인생을 성찰하는 고뇌와  무게감이 있었다.



 날씨도 도와주는지 늦겨울의 제주는 봄이 완연하게  온 듯  따스했다.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쪼겐 보람이 있었다.  평일이라 여행객들이 북적대지 않았다.

공항에 내린 최형국은

선글라스를 찾다가  속옷 틈 사이로 삐죽이 튀어나온 붉은색 카드를 발견했다.


" 최형국 씨! 술 많이 마시지 말고 , 과일도 먹지 말고. 단 여자는 많이 만나고, 사고도 좀 팍팍 치시고,  식이조절 명심 또 명심. 나도 좀 즐길라고 하니 제주도에서 푹 눌러앉아   오지 마셔!"

딸이 쓴 편지였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최형국의 아내는  5년 전  췌장 암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상실의 아픔으로 충격이 컸던 최형국은

사업도 손 놓고 술만 마시면서 6개월을 보냈다.

 아버지를 지켜볼 수 없었던  딸은  봇다리를 싸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대학 입학과 동시에

독립선언을 했던 외동딸이었다.

딸 은지는 힘든 시간 최형국이 의지 할 수 있는 희망이었다. 그렇게  최형국이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후유증은 컸다.

  몇 년 전부터 당뇨가 온 최형국은  약 먹을 단계는 아니었지만 운동과 생활습관으로 혈당을 관리했다. 최형국은 어젯밤 고혈압 약을 깜박하고 안 먹은 게 생각났다.

비교적 일찍 찾아온 성인병은 삶을 우울하게 했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어린아이 챙기듯 간섭하는

딸과 늘 싸우면서도 같이 살고 있었다.


초봄에도 미니스커트를 입은 젊은 여행객들은

선글라스 밖으로 훔쳐보면서 최형국에게 잊고 있던 젊음을   느끼게 해 주었다.


서귀포에 있는 콘도로 목적지를 잡고

택시를 기다리는데 바다 냄새 같은 비릿한 공기 속에서

달콤한 백합향이 코끝을 비집고 들어왔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긴치마에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입은 뚱뚱한 여자의 뒷모습에 시선이 멈추었다.

먼저  온 택시 안으로  여자는 미끄러지듯 사라졌다. 택시 문이 닫히자.

꽃잎이 날리듯이 향기가 퍼졌다. 최형국은 후각에 취해 정신이

 아찔해졌다. 심장이 요동치고

갑자기 얼굴에 열기가 오르면서 아랫도리가

뜨거워져 왔다. 백합향이  감돌던 그날!

 얼굴도  희미해져 가는  그 여자는 기억 속에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전갑련이란 여자를 도대체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향기에 취해 잠시 아련한 생각 속에 빠져들던 최형국을

현실 속으로 끌어낸 건  김 사장의 억 센 팔이었다.



" 하교수가 최 사장 여기 있다 하더라고요.

와 오늘 날씨가 너무 좋네요.

우리 몇 달 만입니까 이렇게 모이는 게"


"김 사장님도 참  석 달밖에 안됐습니다. 코로나 터지면서 좀 쉬었으니까요."


평일 아침에 시작된 라운딩은 한산했다. 페어웨이나 그린 상태도 훌륭했다.

4명의 사내는 장타가 강했다. 실력도 비슷해서

승부에 집착하지 않고  편안한 대화들이 오갔다.

최형국은  후반 출발이 좋았다.  11번 파 5홀에서 써드샸이 홀컵에 붙었다.

잠시 숨 고르기를 하던 김 사장이 하교수에게 말을 걸었다.


"하교수님 지난번 올려주신 시 말입니다.

아 머리에 쥐 날 뻔했습니다"

최형국도 한마디 거들었다.

"하교수님!  시는 잘 모르겠는데... 여자들 마음 녹이는 데는 또 시만 한 게 어디 있겠습니까!"


하교수는  바람에 날리는 흰머리를 쓸어 올렸다.


"여자를 언제 만났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합니다. 강의하느라 학교에만 있다 보니

애들만 득실거리지 어디 여자 냄새나는 사람 구경하기도 힘드네요.

마누라는 이제 자기 놀기 바쁘고.  애들도 친구들하고 노느라 얼굴 보기 힘들고. 긴 밤이 외롭습니다.


말수가 적은 박사장이 진중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도  우리 모임에 여자가 안 끼니까 오래간 거지.... 여자들 끼면

골치 아파집니다, 사내들이 또 여자들한테 잘 보이려고 난리 칠 테니...."


박사장은 마스크를 잠시 벗었다.


"마작할 때 뭐가 제일 어려운지 압니까? 빌어먹을 네 명의 사람이 모이지 못해서 못합니다."이왕 이렇게 만난 거 우리 오래 가야지요."


최형국은 이들과의 내기골프에서 늘 돈을 잃을 만큼.

골프 실력이 떨어졌지만   세명의 친구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했다.

그들에게 돈을 쓰는 것이 아깝지 않았다.

 이들과 골프를 치다 보면 지난 시간 개처럼 돈을 벌며 살아온 자신의 인생이 스쳐갔다.

한때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났지만 꿈같은 시간은  잠시뿐이었다.

아버지의 사업이 망하고 모든 것이 산산이 무너져 내린 건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하지만 보란 듯이 성공한 지금. 다시금 누리고 있는  상류층의 특권을 자연스럽게 누리고 있는 이들 무리 중  한 사람이라는 은근한 자부심과 힘들게 살아온 삶의 보상을  이제는 상류층의 우월감으로 채우고 싶었다.

그들은 서로를 친구라 부르며 허물없이 지냈다.


 친구들에게 돈을 쓰고 있을 때의 만족감은 컸다. 가방끈이 짧은 그가 사업에 성공해서 이만큼의 부를 누릴 수 있었던 건 특유의 사교성과 낙천적 기질과  후안무치 같은 뻔뻔함 때문이었다.


세명의 사내들은 모두 명문대 출신의 엘리트들이었다. 고졸 출신인 형국은

이들에게서  기죽지 않았다. 맨땅에 헤딩하듯 사업을 불려  자수성가 한 스스로가 늘 자랑스러웠다..

그들보다  최형국은 경험으로부터  아는 것이 많았고 바닥부터 살아온 인생이라. 사람 다루는 솜씨가 능숙했다.

 무식한  농담을 즐겼지만, 격을 지킬 줄 았았고, 모임의 분위기를 주도하는 사람은 언제나 최형국이었다.  


라운딩이 끝나자  1차 저녁 술자리를 선술집에서 끝내고  콘도로 돌아와서 그들은 다시 콘도 안에서 술판을 벌였다.


술자리가 무르익자.  여자들이 없는 청정지역이라는 인증숏을 찍듯 그렇게 일행들은

술판 현장 사진을 찍어 와이프에게 보냈다.


"이렇게  해야 마누라가 또 안심을 하고 두 다리 뻗고 잔다니까"

혹시나 사내들끼리 이상한 곳에 가지나 않나 별의별 상상을 다 하면서 사는 여자라서...."

김 사장이 푸념하듯 이야기하자.

" 그 영화 뭐더라 완벽한 타인에서 나오는 이야기들 았잖아 핸드폰을 하루만 다 까도

비밀 백가지는 나온다고. 우리는 꼭꼭 숨겨야 할게 많으니까!"

"아니 이 나이에 그런 거 까지 신경 씁니까? 아 우리는 그런 거 신경 안 쓴 지 오랍니다.

방목 수준이죠. " 이렇게 말하는 박사장에게 불쑥 최형국이 한마디 했다.


그의 발음은 굵은 바리톤 저음의 묵직한 오페라처럼 깔리고.

잠깐의 침묵이 돌자 주변의 시선은 형국을 향해 침을 꼴딱 삼길만큼 몰입되었다.


늘 그렇듯이 형국은 이런 분위기로 이야기의 주도권을 잡는 데는 일가견이 있었다.

네 명의 사내들은 형국의  입만 쳐다보았다.

"우리 딸내미는  

마누라 죽고 연애질 한번 안 하고.

당뇨에 고혈압에 물건이 말을 안 들으니...

맘 편하게 다시 나가 살게 여자 친구 좀 사귀라고

날마다 잔소리를 해댑니다.

나 원 참 딸내미한테 니 아버지 이제 남자 구실 못하니까 신경 좀  거라고 했죠."


"최 사장 부럽네요. 딸하고 그렇게 허물없는 대화도 하며 지내고.

 중학생 딸하고  요즘 말 섞어 본 지도 오래됐는데..."


하교수가 막걸리잔에 술을 채우며 말했다.


 "하교수님 딸내미가 며칠 후 선물이라면서  뭘 하나 던지고 가는데

그게 뭔 줄 아십니까?

비아그라 더라니까요."


모두가  한바탕 웃었다.


"효녀가 따로 없네 최 사장 "

최형국이 손을 가로저었다.


"젊을 때 내가 사업을 한답시고 거래처  접대니 뭐니 늘 술집에서 살다시피 하다 보니  30대 때 여자 문제로 죽은 마누라 속을 뒤집어 놓는 일이 많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그 일 때문에 내가 벌을 받는가 싶기도 하고....."


" 최 사장아 그런 말 하지 마라 최 사장이 벌  받으면 대한민국 남자들 다 저세상

갔을 거다. 시끄럽다마! 나는 최 사장이 부럽다 카이. 혼자 마음껏 눈치  안 보고 산다는 게

얼마나 팔자 좋은 건지 모를 거요."


김 사장 얘기를 들은 최형국은 소주를 들이켰다.


 " 자유의 몸이면 뭐합니까?

김 사장님은 내 심정 모를 겁니다. 여자하고 호텔에 갔는데... 할 게 없을 때

그 기분.  여자는 욕실에서 씻고 있는데  일부러  와인 한 병 다  마시고

취한 척하고 먼저 자야 하는 그 기분.  이제 둘이 만나서 할게 커피 마시는 거 말고는 없습니다."

 

하교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 내 친구 하나도 발기부전이니 해서  비아그라 먹었더니

효과가 즉방이던데."


"하교수님 전 먹어도 아무 소용없더군요. 심리적인 이유인지 의사도 원인을 모르더군요..

이제는 뭐  여자 생각도 별로 안 나고...

그냥 수도승처럼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는데....

최근에 어떤 여자를 만났습니다."


 최형국은 이야기를 꺼내다 말고. 잠시 주저했다.


세상의 가십거리들을 좀 오버해서  최형국

자신만의 스타일로 지껄이는 농담들은

지금껏

세 사내들에게 즐거움과 재미를 주었다.


하지만  왜  불쑥 여자 이야기가 튀어나온 건지  최형국은 자신도 모르게 당황했다.


그때 최형국의 머릿속에서는 공항에서 본

그 여자의  백합향이 코끝으로 스쳐 지나갔다.



 

" 6개월 전에 만난 여자인데....

"그것도 아주 못생긴 데리고 다니기도 민망한 뚱뚱하고 별 볼 일 없는 그런 여자입니다."

그는 자신이 조금 사실을 왜곡한다고 느꼈지만

세남자를 이야기속으로 끌어 들이기에는 조금은 각색 할 필요가 있었다.


최형국이 무식한 농담은 잘 던졌지만 이렇게 진지하게 여자 얘기를 꺼낸 건 처음이라!


일순간 모두 눈이 동그래졌다.



불알친구도 아니고 사회에서 비즈니스로 만나 1년 남짓  골프를 치다 모이게 된 친분이었다.

최형국의 고백 같은 이야기에 점잖을 빼며 앉아 있던 자세의  사내들은 일제히 와이셔츠 단추를 하나 풀어헤친 것처럼 느슨해졌다.

단추가 하나 툭 끊어지는

추임새를 일제히 내고 있었다.


 " 빨리 얘기 좀 해 보이소"


   "어떤 여자길래 비아그라가 효과가 있었습니까?

김 사장이 채근하자

최형국은 걸쭉한 입을 열었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소설인지

가끔씩은 최형국 자신도 헷갈릴 때가 있었다.




최형국은 전갑련을 생각하자 오래된 흑백 필름을 돌리는 것만 같았다.


전갑련! 그녀 이야기를 팩트로 꺼낼 수는 없었다.

어디까지 각색을 할까 잠시 망설이다.

군침 당기는 시선으로 남자 셋을 끌어들였다.



""예전에 연애할 때 있잖습니까? 이쁜 여자들하고 한번 자려면 태백산 한번 오르는 것보다 힘들게 작업을 해야 되는데... 막상  잠자리까지 성공하는 그날 그 순간에

저는 꼭 긴장을 해서 그게 서지 않는 일이 많았습니다. 근데 또 이쁜 여자들이 처음부터 먼저 덤비면 불쑥 겁부터 나서 이거 무슨 꽃뱀은 아닌가?  뭔가 있어,. 싶기도 하고.. 별별 생각이 다 드는데... 그날 만난 그 여자는 처음부터 아무 경계가 없었어요. 마치 오래전 알던 사람을 만난 것처럼 익숙했는데.

그게 이상한 설렘과 쾌감을 주더라고요."

"비아그라를 먹은 것도 아닌데. 그날 전 딴사람이 되는 거 같았습니다.


"뭡니까? 그 여자랑 그날 잤다는 말입니까?


내가 사업을 한답시고 술집 여자들하고 어찌하다 보니 살을 쫌 많이 섞어 봤는데.... 이런 여자는 정말 처음이었습니다.


 하교수가  침을 삼켰다.

최형국은 장난기 있는 미소를 띠면서 말을 이었다.

"멍게 같은 여자라고 들어봤습니까?

수저로 퍼내도 마르지않는 마농의 샘 같은"


" 에이 그런 게 어딨어.. 갱년기 여자 요실금 이겠죠?"


형국이 박사장을 향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게 아니라니까요. "


박사장의 농담에 모두 웃었지만 최형국은 진지했다.


김 사장의 목소리가 커졌다.

"뭡니까? 옹녀 뭐 그런 겁니까? 그래서 그다음에는 어떻게 됐습니까?


"그다음요?"

"모릅니다. 그게 끝입니다. 그 여자 이름 석자밖에 오릅니다."


"그날 이후로 그 여자를 찾을 길이 없습니다."


밤은 깊어가는데 사내들은 술에 반쯤 절여져서 형국의

끈적한 이야기에 만취해서 빠져들었다. 아무도 술잔을 기울이지 않고 형국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들을 마셨다. 마셔도 마셔도 상상만으로도 빠져드는 에로티시즘은

사내들의 가슴속에서도 비너스처럼 살아났다.

각자의 숙소로 돌아온 사내들은 제주바람에 실려오는 비릿한 냄새와 함께  잠을 이루지 못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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