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소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토끼 Sep 13. 2021

물 많은 여자 (12편 )

고개 숙인 남자


박용재는 테이블 위에서 잠들어 있었다. 그의 술버릇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했다.

혼자서 푸념 같은 넋두리를 늘어놓다가 반쯤 감 긴 눈으로 상대를 지긋이 보다가 어느새

잠들어 버렸다.


일하러 간 엄마를 기다리다 지친 어린아이처럼 새근거리며 잠든 그를 보면서 전갑련은

지옥 클럽이 낯설게 느껴졌다.

내부는 블루 계열의 깔끔한 빠를 겸한  인테리어로 변해있었고,

춤추는 무희도 화려한 조명도 없는 그곳에 그녀의 존재 자체도 사라진 것만 같았다.


홀 안에는 손님들이 북적이고 있었지만 혼자 덩그러니 이방인처럼 남겨졌다.


박용재라는 남자만이 자신의 과거를 증명해 주는 유일한 흔적처럼 남아 았었다.


"루피나 언니 아냐?"

익숙한 목소리에 그녀가 뒤돌아 보았다.


제니가 환하게 웃고있었다.


" 제니구나 너"


"언니 그동안 어떻게 지낸거야?"


둘은 서로 반가워서 부둥켜안았다.


전갑련이 제니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놀란 눈을 크게 떴다.


" 나 살이 좀 많이 쪘지! 춤추는걸  관두고 나니까. 순식간에 살만 붙어버리더라고"


" 아냐 아냐 너무 보기 좋아. 제니 너 정말 좋아 보인다"


" 나 춤 때려치우고, 결혼하고 애 키우느라 정신없었어.

나 여기서 바텐더로 취직했어 한 5년 됐어"


제니 얼굴에서는 안도의 한숨과 그리움이 스쳐갔다.


" 언니 많이 보고 싶었어. 언니 떠나고 연락도 안되고 죽었나 살았나 소식도 모르고

내가 얼마나 속상했는 줄 알아"


그녀는 테이블에 잠들어 있는 박용재를 보았다.


" 언니랑 마시다가 저렇게 된거야?

 별일이네  저승사자가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다 마시고..... 아이고 떡이 됐네 떡이 됐어.."


그들은 박용재를 혼자 두고 옆 테이블에 앉았다.

홀 안은 순간 조용한 분위기의 음악으로 바뀌었다.


" 어떻게 10년 동안 소식 한번 없었어?"


" 나  다시 서울로 이사 왔어"


" 정말 너무 잘됐다."

그녀가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 직원들이 많이 바뀐 거 같아 꼬봉이 아저씨도 안 보이고..."


" 아! 꼬봉이 아저씨? 몇 년 전에 저승사자가 독립시켜 줬잖아! 지옥 클럽 가맹점식으로 홍대 쪽에 오픈했어.

아주 자선사업가 납셨어,

언니도 얼굴 좋아보이네 어떻게  하나도 안 변했어"


"나 빚 갚느라 정신없어서 늙을 시간도

 없었다. 됐냐?

그냥 저냥  살다 보니  이렇게 나이만 먹었네."


전갑련은 제니의 풍만한 육체위로 잠시 과거의 그림자를 보았다.

무대 위에서 섹시한 모습으로 추던 그

아름다운 몸매가 이제는 40대 초반의 아줌마가 되어 두리뭉실 해졌지만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가끔씩 제니를 떠올릴 때면 그녀와 박용재 두 사람을 연관 지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박용재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혹시 그녀가 지금 박용재의 아내가 되어 있다고 해도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니었다.


제니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언니 이런 거 물어봐도 되나? 결혼은 했어?"


" 아니"


" 다행이다"


" 뭐가"


" 아니... 언니도 참 몰라서 물어?

언니 눈치가 없는 거야! 아니면 둔한 거야! 저승사자가

왜 저러고 사는지 생각해 본 적 없어?"


전갑련은 고개를 숙였다.

"강산이 두 번이나 변했는데도. 어쩌면 두 사람은 하나도 변함이 없냐?

둘이 진짜 판박이처럼 똑같아. "


제니가 안타깝다는 듯 그녀를 보았다.


"제니야 우리는 그런 사이 아니야. "


" 네네 저승사자도 똑같이 그렇게 말했어. 우리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가 아니야라고..

그 김승주인가 뭐인가 하는 증권사 쥐새끼만 아니었어도... 언니하고 저승사자 지금쯤

잘 됐을지 모르는데...

그 새끼 아직도 맞은편 건물에서 일하고 있잖아! 한 번은 술에 잔뜩 취해서  언니 연락처 가르쳐 달라고

저승사자한테 행패를 부리고 난리도 아니었어"


박용재가 테이블 위에서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제니가 일어나서 그에게 다가갔다.


"사장님 일어나세요. 집에 가서 자요. "

그녀는 홀직원을 불렀다.

"미스터 최 여기 사장님 좀 집까지 모셔다 들여"

전갑련도 일어났다.

" 나도 가봐야 될 거 같아"

" 언니 나랑 같이 저승사자 집에 데려다주러 가자"

그들은 박용재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전갑련은 그들을 따라 함께 나왔다.

언니 이 건물 5층이 저승사자 집이야

잠깐 들렀다가 차 한잔 하고 가"


모든 일은 마치 예정된 수순처럼 흘러갔다. 전갑련은 제니에게 이끌려서 엘리베이터를 탔고,

그들은 박용재가 사는 집안으로 술 취한 그와 함께 휩쓸려 들어갔다.

100평쯤 되는 공간은  가구가 별로없어서 더 넖어 보였다.


남자 직원과 함께 박용재를 재우고 나온 제니는 익숙한 듯 주방에서 찻잔을 내어왔다.

" 남자 혼자 사는 집이 이렇게 깨끗해서야 원 사람 냄새가 안나.

누가 저승사자 아니랄까 봐!"

찻잔에 커피 향이 퍼졌다.

"제니야 나 이 시간에는 커피 안 마시는데..."

" 아 미안 언니 물어봤어야 했는데..."

그녀는 구수한 둥글래 티백을 뜨거운 물에 넣었다.

"여긴 직원들이 늘 드나들면서 사는 공간이야!

직원들 방도 있고, 저승사자가 워낙 직원들이랑 격이 없이 지내잖아

.."

"근데 용재 씨 언제 이곳에 이사한 거야? 예전에 경기도 어디쯤 살았던 거 같던데.."

그녀는 몸을 살짝 당겨 전갑련에게 가까이 다가오며 속삭였다.

"2년 전인가 갑자기 이건 물주가 헐값에 저승사자 한데 넘겼어!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는데, 거의 공짜나 다름없는 가격이었데...

얼마 뒤에 어떤 여자가 저승사자를 찾아왔는데.....

둘이 심각하게 한참을 얘기하더니 저승사자 앞에서 아무 말 없이 울기만 하더라고.

꼬봉이 아저씨 말로는 그 여자가  모기업 재벌 세컨드라는데, 회장이 지병으로 죽고 나서

엄청난 유산을 물려받았다는데... 이 건물도 그 여자가 헐값에 저승사자한테 넘긴 거나 마찬가지라는 얘기가 있어. 언니 저승사자한테 뭐 들은 거 없어?"


" 그런 얘기는 용재 씨가 잘 안 하니까 난 모르지 "


그녀는 실망한 얼굴로 떨어져 앉았다.


" 언니 무슨 일 하면서 지내? 김승주가 그러던데 언니 물리치료사였다던데..?"

가끔씩 나한테 찾아와서 언니 얘기를 해 그 남자"


" 작년까지 그랬었지. 빚 다 갚고 때려치웠어. 지금은 요양보호사 일 하고 있어?"


" 병든 사람들 수발하는 거 힘들지 않아? "


" 할머니 할아버지는 케어해주는 일.

생각보다 보람도 있고 적성에 잘 맞는 거 같아"


제니는 핸드론을 보더나 벌떡 일어났다.


"언니 미안해서 어쩌지 애들 아빠가 데리러 와서 나 가봐야 할 거 같아. 언니는 조금만 더 있다가 저승사자 깨면 얼굴 보고 가던가 해 나중에 연락할게 "


전갑련이 옷을 입을 새도 없이 그녀는 집 밖으로 나갔다.


혼자 남은 그녀는 외투를 걸쳤다. 마치 짜인 각본처럼 그녀를 박용재의 집에

혼자 남겨놓고 그들은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창밖으로 영등포의 밤거리를 바라보았다.

술 취한 취객들이 비틀거리면서 밤거리를 지나쳐 갔다.

그곳은 사람이 살고 있지만 사람 냄새가 없는 집이었다.

주방에는 요리를 해먹은 흔적이 없었다. 넓은 거실을 지나자 복도식 통로 사이로 방이 네 개가 줄줄이 나왔다.

한쪽 방문을 열자 운동기구가 즐비한 피트니스 룸으로 꾸며진 방이 나왔다.

다른 방은 손님들이 거처하는 방처럼 침대들이 몇 개 있는 넓은 방이었다.


다른 방은 서재로 꾸며져 있었다. 넓은 서재에는 큰 접이식 소파가 침대처럼 놓여 있었다.

벽시계가 자정을 넘기고 있었다.

소파에 몸을 기댔다. 안락하고 편안했다.

그녀는 생각했다.

"지하철도 끊기고 택시비는 아깝고

옛 친구의 집에 하룻밤 의탁하는 게 뭐 어때서..

더구나 혼자 사는 남자의 집. 그것도 자신을 좋아하는 남자가 아닌가!"


박용재의 서재에는 여느 집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장식용 사진액자 하나 없었다. 그의 흔적은 하나도 없었다.

그녀가 생각하는 박용재의 존재는 안방에서 잠든 술 취한 남자가 전부였다.


이 집에는 그라는 사람을 증명할 물건이 하나도 없었다. 그가 잠든 안방에도 그의 흔적은 없을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가 생각하는 박용재라는 사람을 애써 떠올려 보았다.

그는 건장한 체구의 잘생긴 남자였다.

온몸에 문신을 한 팔다리를 드러내고 당당하게 걷는 남자였다.


그녀가 기억하는 박용재는 늘 반듯했다.

그녀의 이야기에 늘 수긍해 주었고, 항상 그녀의 의사를 존중해 주었다.


건달 같은 말투였지만 그녀 앞에서는 수줍음이 많았고, 편한 사이가 됐을 때도 거리두기를 했었다.

그는 사진 찍히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소파 옆에 그의 하늘색 셔츠가 걸쳐 있었다.

그는 하늘색을 좋아했다. 그는 늘 깔끔하게 정리정돈을 하는 남자였다.


그녀가 박용재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부모님이 계시고 외아들이라는

사실이 전부였다.


그에게 숨겨진 사연 있는 여자가 열명쯤 있다고 해도 그녀는 이상할 게 없었다.

박용재는 그만큼 미스터리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가 하는 말이라면 모두 믿음이 갔고,

그가 나쁜 일을 저지른 은둔자라고 해도 그에게는 무슨 이유가 있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녀는 문득 박용재의 집에 불편해졌다.


그의 인생에 발을 깊숙이 들이면 빠져나가기 힘들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그녀는 집안의 모든 불을 끄고고양이 걸음처럼 살금살금 문을 열고 박용재의 집을 빠져나왔다.


지옥 클럽의 간판은 여전히 정겹게 멀리서 그녀를 지켜보는 것만 같았다.


계속

매거진의 이전글 물 많은 여자(1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