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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끼 Jun 17. 2021

물 많은 여자 (4편) 개정판

한여름밤의 꿈




낙원 여인숙에서의 하룻밤은 한여름밤의 꿈처럼 현실인지 상상인지 몽롱했다.
최형국이 핸드폰을 열자 딸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뜨고 문자가 와 있었다.

"전화도 안 받고 웬일로  외박을 다하시고..... 좋은 일인 줄 알고 있겠어요.ㅎㅎㅎㅎㅎㅎ"


 집 현관문을 열자. 부스스한 얼굴을 한채 아침을 먹고 있는 현지와 마주쳤다.
최형국은 잠깐 미소를 보이고 식탁에서 커피 내릴 준비를 했다.

 " 아빠 출근이야? 퇴근이야?"

 " 서류 좀 갖고 갈게 있어서..."

안방으로 사라지는 최형국을 현지는 물 끄러미 바라보았다.
외박을 한적인 없던 최형국이었다. 현지는 외박한 이유가 궁금했지만
기다리는 일이 이제 익숙해진 부녀 사이가 돼가고 있었다.

몇 년 전 그녀가 최형국에게 내뱉었던 비수 같던 많은 말들이 순간 지나쳐 갔다.

최형국을 수렁에서 건진 건 딸 최현지의 위로가 아니었다.

 술만 마시는 최형국을 보다 못한 현지는 참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삶을 팽개치고 있는 최형국의 모습에서 엄마의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분노가 폭발했다.

 술병들을 팽개치면서 그녀는 소리쳤다.
 "이제 좀 그만해. 정말 못 봐주겠다. 아빠는 아빠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나 본데 아빠는 슬퍼할 자격도 없어. 아빠가  어떤 사람인 줄 알아?
 집에서는 세상 다정하고 온화한 아빠이면서 밖에 나가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끍어 모으는 사람이었지... 아빠는 철저하게 두 얼굴을 하고 우리를 속였어..
내조만 하는 아내가 지겨웠어? 사업하는 사람 신경 쓰이게 한다고 그림자처럼 살았던
 엄마가 그렇게 호구로 보였어? 엄마가 몰랐을 줄 알아? 아빠가 여자들이랑 바람피운 거?"

그때 자신을 바라보던 최형국의 눈빛에서 현지는 절망을 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술집 여자들이야 아빠의 일 때문이라고 통 크게 넘어가는 엄마였어 하지만 그 여잔 사랑이었잖아! 엄마는 매일 밤  몰래 아빠 핸드폰을 뒤지던 자신 때문에
미칠 것 같다고 했어!
 엄마는 그걸 다 알면서 죽을 때까지 자기가 아는 걸 얘기하지 말라고 나한테 비밀로 하라고 눈을 감았어. 엄마가 병이 난 건 다 아빠 탓이야.

엄만 아빠가 죽인 거야.  왜? 그래서 그 여자랑 이제 같이  살려고 하니까  이제 와서 죄책감이라도 드는거야?" "
현지는 앞뒤 말을 가릴 사이가 없었다. 그녀의 분노는 엄마의 약속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엄마의 그림자가 최형국 사이로 빠져나가듯 최형국은 다음날
술을 끊었다.
그를 수렁에서 건진 건
바로 아내 김수경이 그의 외도 사실을 알면서도 끝내 말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는 진실이었다.

현지는 그날 이후 엄마 얘기를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
최형국이 커피를 내리고 현지 앞에 앉았다.

"아빠 그 여자분 있잖아! 왜 헤어진 거야?"

서류뭉치뒤적이면서  커피를 마시던 최형국은 현지를 바라 보았다.
"뭐가 궁금할까? "

최형국의 눈빛은 체념 같았다.
"아빠 나도 철들었나  봐.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는 영화 제목처럼
아빠 나 후회하고 있어 엄마하고 약속 못 지킨 거. 빠가 혼자 이렇게 외롭게 사는 거 엄마도 원치 않았을 거야. "

"현지야. 그 얘긴 우리 하지 말자."

 "미안해. 한 번도 아빠 입장에서 생각해 보지 않았어!.
아빠도 남자고 엄마 같은 여자가 얼마나  숨 막혔을까?라는   생각을 안 한 것도 아냐!"
"나 이제 나가봐야겠다. 커피를 너무 많이 내렸네... 식기 전에 마셔."

최형국은 사무실로 차를 몰았다.
언제나 모든 일들은 시간이 지나고 거리두기를 해봐야지만 알 수 있었다.
최형국은 문득 생각했다.
"그 여자를  사랑했던 걸까?"
헌신적인  아내의 사랑이 부담스러워서
아름답고 자유롭고 이기적이었던 그녀에게 가볍게 끌렸던 이라는 결론을 얻기까지는 아내의 죽음 이후에 선명하게 드러났다.
남편의 외도를 알고서도  
가슴에 묻고서 끝내  침묵했던 아내의 숨은 의도 또한 사랑이 아니라 마지막 복수였다는
사실도 최형국이 아내의 그늘을  지워내는데 한몫했다.
하지만 그 선명한 결론들은 최형국의  인생을 무관심과 냉소주의적으로 변화시켰다.

홍현숙을 기다리던
전갑련은 노트를 꺼내 메모를 시작했다.

누군가는 내 삶이 불행하다고 말한다.  처음부터 내 삶이 불행했던 건 아니었다.
삼 남매의 맏이로 태어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홀어머니에 홀 외할머니와  함께 가정을 책임져야 했다. 동생들뒷바라에  대학도 내 힘으로 일하면서 다녀야 했다. 하지만 행복했었다. 내 행복은 딱 거기까지 였다. 동생 둘이 잇따라 사고만 치지 않았더라도
좀 더  일찍 가족들에게서 독립했더라도. 어머니의 그 한숨소리에 조금만 냉정했더라도
그 많은  빚을 내가 떠안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와서 누구를 탓하겠는가!  이 빚만 갚고 나면 이 빚만 갚고 나면 하던 세월이 1년이 되고 10년이 되고 벌써 15년이 되었다. 그사이 남동생들은 자리를 잡았지만.
그 빚은  온전히 나만의 몫이었고
남동생은 자기 살기에만 바빴다.
이제 나도   늙어 버렸다. 아무것도 이룬 것도 없이 십을 넘겼다.
그리고 이제야 가족으로부터 독립을 했다. 그리고 20년간 일해오던 물리치료사라는 직업을 접고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이제부터 나는 나만의 인생을 살기로 결심했다.

노트에 마침표를 찍었다.
전갑련은 속이 후련했다.
 어젯밤 자신이 저지른 일들을 생각하니 인생이라는 게 이렇게 드라마틱할 수도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 지금부터 시작인 거야! 이제는 저지르면서 사는 거야. 오랜만의 휴가를 휴가답게 쓰고 싶은 그녀는
노트의 다른 페이지를 펼쳤다.
빼곡하게 적힌 버킷리스트 중 하나에
천천히
줄을 그었다.


"과거의 인연을 놓아주기."

인덕원역에 도착한 홍현숙은 전철역에서 노트에 메모하고 있는
갑련을 멀리서도 알아봤다.
늘 전화 통화만 하다 1년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달자야! 잘 찾아왔네..."

"야!
나 갑련이야 언제 적 이름인데 아직도 달자니 넌"
너 좋은 곳으로  이사했다. 인덕원이면 집값이  장난 아닐 텐데..."

"대출 끼고 좀 무리했지 뭐!
난  아직도  달자가 입에 붙었어. 어제  형국이는 만났어?"
"최순남 여사를 아시느냐고 물어보기는 했고?"

현숙은 숨 쉴 타이밍도 안 주고 질문을 퍼부었다.

"아니 최순남 여사도 모르고 나 전달자, 아니 전갑련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더라..."

"아니  전달자  그 촌스러운 이름도 기억 못 해?."

" 전달자라는 이름은 얘기 안 했어. 최순남 여사를 모르면 물 건너간 거지..."

"야 기억을 한다면 그게 이상한 거지 초등학고 5학년 때 일을 아직 기억하는 사람이 어딨냐?"
"현숙아?."
전갑련은 어젯밤 일을 말하려다
마음을 바꿨다.

"형국이는 잘살고 있대? 애는 몇이래?


"몰라? 그런 거 하나도 안 물어봤어. 야 내가 자기 뒷조사해서 산에 까지 따라온 거 알면 스토킹 한 줄 알고 이상한 여자 취급할 텐데.."

꿈같은 밤  첫사랑 동창생은 전갑련에게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사람이었다.

그를 1년 전 병원에서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이런 일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산행 후 다친 몸으로 응급실에 실려온


최병국을 전갑련은 한 번에 알아봤다.

산악동호회 사람들 손에  부축을 받으며 병원으로


들어선 형국을  알아보고 이름을 확인했을 때

전갑련은 세상에 존재하는 운명이라는 걸 믿었다.


40년이란 시간이 지났지만

이마 위의 빨간 점과 최형국이란 이름 석자를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어제의 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전갑련 자신이 아니었다. 어떻게 스스로가  그렇게 과감할 수가 있었는지. 어떻게 최형국이 자신을 따라올 것을 확신했는지...


여인숙을 향해 걸어가면서


운명이라는 걸  또 한 번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밤도 늦었고, 선배 언니의 집도 멀고, 그녀는 어차피 그곳에서 잘 생각이었다.


최형국이 뒤에서 따라오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가슴이 얼마나 뛰었는지 지금도 심장박동을 느낄 수가 있었다. 하지만 어차피 그를 한 번만 만나고 끝낼 계획이었다.


그 계획에 뜻하지 않은 변수가 생긴 것이었다. 무슨 결정적 사고가 그를 유혹하는 계기가 됐는지 전갑련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와 하룻밤을 보내는 일은 계획에 없는 일이었다.


 단지 그가 그녀를 혹시 알아볼지도 모른다는 동화 같은 상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에게 말 한번 못 붙여보고 끝날 판국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이팝나무 아래 나란히 앉았을 때  전갑련은 그의 숨소리를 들으며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했다. 우연히 다시 만난 그와의 인연도 모두 없었던 것처럼 끝나는구나. 현실 속 이 남자는 단지 한 여자의 남편이고 한가정의 가장일 뿐이구나 이제 나와는 무관한 사람이구나...

 내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사람이구나 라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이팝나무 아래 봄밤은 그녀를 가만 놔주지 않았다.


그녀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운명이라는 자신감이 오늘 밤 하루만이라도 최형국을 가질 수 있다는 확신으로 번졌다.  그녀에게는 사람을  살아있게 하는 무기가 있었다.

아마도  그 힘의 본능을 시험해보고 싶었는지  몰랐다.


여인숙을 따라 들어온 형국의 첫마디는


평생 잊지 못할 단어가 되었다.


"갑련씨? 갑련씨는 첫 경험이 없다고 하셨죠?


유감이지만  그 첫 상대가 저는 아닌 거 같네요"


그녀는 그때 그의  마음은 자신을 원하고 있다는 걸

확신했다.


"뭐라고요? 그럼 하지도 않을 거면서 절 왜 따라오신 거예요?"


" 갑련씨를 그냥 보내면 안 될 거 같아서요."

전 이제 섹스를 할 수가 없어요. 물건이 서질 않아요. 슬픈 일이죠.

갑련씨는 첫 경험이 없고. 전 마지막 경험의 기억을 안고 앞으로 살아야 하니까요."


최형국은 진지했다.


그녀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오해하지 마세요. 전 그냥 제가 알던 어떤 사람이  생각나서 웃는 거예요. 그쪽 물건 사정은  저도 유감이에요.


제가 지껄였던 첫 경험이니 뭐니 그런  얘기는 그만 잊어버리세요. 오랜만에 옛 친구를 만난 것 같아 그냥 반가워서


제 얘기를 하다 보니까. 즉흥적으로 나온 것뿐이에요."


전갑련은 최형국과 마치 12살 그때의


어린아이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아까 제가 뭐랬어요. 오늘은 저한테 축제 같은 밤이니까

 우리는 오늘 축제를 즐기는 거예요.

엄마 아빠 자식 뭐 그런 거 다 잊고 그냥

여자 남자 사람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그렇게 잠깐 함께 시간을 보내는 거죠.


뜨거운 심장은 뛰고  함께 마음을 나누면 되죠. "


최형국은  여유 있는 미소를  띄었다.

전갑련은 생각했다.


성욕이 없어진 남자의 평온함이란 저런 것일까?

그의 와이프는 매일 온화한 저 표정 속에서

평온과 안락함을 누리는 걸까?


그녀는 갑자기 마른가 지가 바쓰 락 거리는 질투를 느꼈다.

하지만 설렘이 질투를 추월하자.

다시 용기가 질주했다.

그에게 다가가 두 팔로 허리를 감쌌다.


등산 복안으로 느껴지는  그의 근육은 결이 살아 있었다. 외복사근과 광배근 사이의 근육들이 지방질과  어우러져 손에 적당히 잡혀 왔다.


"그래도 키스 정도는 해줄 수 있죠?"


"갑련씨 절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거면 됐어요. 오늘은 그거 하나면 최고의 만찬입니다. 전 이제 씻고 잘 겁니다."


이제 집에 가셔도 돼요. 전 기분도 한결 좋아지고 잠도 잘 올 거  같아요. 오늘 너무 피곤한 하루였어요."


그녀는 눈을 감았다.



어린 형국이 그때처럼 환하게 웃었다.

"야 최순남이 누구야?  빨리말해!"


라고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때 최형국이 전갑련을 따뜻하게 포옹했다. 이별의 긴 포옹이었다.


어깨를 토닥이더니 머리칼을 쓸어내리며 얼굴을 어루만지고. 뺨 위에 입을 맞추었다.


전갑련은 가슴이 뛰었다. 그의 입술이 긴 세월을 밀어 젖 치고 전갑련의 혀끝과 만나자. 전갑련은 불현듯 이병수 할아버지를 떠올렸다.


 마지막 굉음을 내며  횃불처럼 불타오르는

녹슨 기차가 기적소리를 토해냈다.

그녀는 등산복 사이로 손을 넣었다. 따듯한 몸의 감촉.

탄탄한 복근에 그녀의 손이 닫자  그는 움찔 놀랐다.


그녀의 손은 복근 위에서  피아노 건반을 움직이듯 물결쳤다.

최형국은 눈을 감았다.

그녀의 손끝은 입술만큼 부드러웠다.

지금 그녀에게 맡겨진 남자에게 금지된 구역은 없었다.


그녀의 손은  배꼽과 치골 사이의 근육 위에서 멈췄다.

전립선이 만나는 신경을. 따라서 아주 작은 손가락의 움직임이 천천히

원을 그리듯 간지러움을 태우듯....

회전했다. 서서히 빠져드는 환각의 강처럼

 끈질긴 애무를 견디다 못한

최형국에게서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드디어 짐승이 깨어날 시간이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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