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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끼 Jun 21. 2021

물 많은 여자 5편

그 여자와 그 남자의 사정.


최형국은 동대문 시장에서 고교 졸업과 동시에  노점에서 티셔츠를 시작으로

무일푼으로 장사에 입문했다.


성실하게 일해서 노점을 접고 가계를 얻었고, 티셔츠에서 청바지로 갈아탔다.

빠른 시간 안에 청바지를   시장에서 떼어다 판 데님으로 로드숍 체인을 만들기 시작했다. 30대가 되면서  그에게  돈을 불려다 준 사업은 브랜드 카피 의류 제작 사업이었다.

허술 한 법망을 피해 유명 브랜드를 카피해서 몰래 유통시켜서 벌여 드린 돈은 훗날 브랜드 카피 소송에서 지고  엄청난 과징금을 내고도 재기할 수 있는 사업자금을 비축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새로운 사업에 뛰어들어 그는   직원 50명을 거느린   지금의 안정된 회사를 만들었다.

전국 모든 의류업체들이 최형국이 만든 단추들을 납품받고 있었다. 그가 디자인한 단추들은

이태리 장인들에게도 입소문이 나 있었다.


동대문시장에서 잔뼈가 굳은 그의 삶은 경제적인 부를 안겨 주었다.

임원들과 점심을 먹고 최형국은  혼자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옛 연인 유문종을 기다렸다.   


멀리서 구두 소리가 또각또각  나더니 가슴골이 드러난 시스루 원피스를 입은 그녀가 자리에 앉았다.


"난 자기가 안 나올 줄 알고 내내 불안해하면서 왔어"


긴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그녀가 말했다.

연한 머스크 향이 코끝을 자극했다. 기억은 자연스레

호텔방에서 그녀의 품속에서 맡곤 했던   냄새를 떠올렸다.


그녀는 그보다 7살이나 어렸지만 그와 잠자리를 가진 후부터 그에게  반말을 쓰기 시작했다.


"친구처럼 편하게 지내고 싶다면서? 나도 동의했고... 내가 안 나올 이유가 없잖아!"

최형국은 한 모금 남은 커피를 다 마셨다.


" 서른 후반이 되니  힘이 려서 이일도 못해먹겠어.

어디 돈 많은 홀아비 하고 연애해서 시집이나 갈까 봐! "


그녀는 실없는 웃음을 지어 보이며  그의 눈 치른 살폈다.


"힘들면 얘기해.  괜찮은 곳 알아봐 줄게 방송국이야 많잖아"


"그럴 필요 없어. 나 회사 옮겼어.

쇼핑호스트 자리는 많아. 지랄 같은 회사에서 10년을 다녔어.

 낮과 밤이 바뀌고 회사가 집인지 집이 회사인지 모를 생활하다가. 주 5일 근무인 쇼핑 호스트 자리로 옮기니까 이제야 사람사는게 이렇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그녀는

붉은색  꽃무늬가 박힌 네일아트를 만지작 거리며 말했다.

매니큐어를 칠한 그녀의 손톱은 한때 그를 유혹하기 충분했다. 붉은 손톱이 그의 살갗을 파고들 때면 그의 쾌감은 핏빛으로 신음했다.

하지만 지금 최형국의 머릿속은

네일아트샵에서  그 긴 시간 그녀가 먼 곳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라는 엉뚱한 상상을 했다.   


브랜드 홍보차 방송국을 방문하던 첫날 그녀와 그는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 5년의 불륜은

변덕스러운 그녀의 성격 때문에 위기가 몇 번 있었지만

아내에게  잘 숨기고 있다고 확신했었다.

그녀와 헤어지는 과정은 자연스러웠다. 그는 그녀에게 아파트를 장만해 주었고,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거사가 없어지자  차츰 관계는 무관심이 익숙해져 갔다.


"난 말이야! 자기 와이프가 죽었을 때, 잠깐 내 독신생활을 청산할까 라는 생각을 한 적 있었어.

야! 인생은 결국 기다리는 자에게 복을 주는구나!라는 생각을 했는데....

복은커녕 이별이라는 더 가혹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어...

그래서 요즘은 아무런 삶에 대한 기대가 없어졌어."


"미안하다.  너한텐 항상...."


그녀는 눈빛이 간절해졌다.


"나 아이 같은 거 낳을 생각 없어. 잠자리에도 연연하지 않아!

근데 왜 날 밀어내는지 난 아직도 너한테 설득이 안돼. 자기가  포기가 안돼."


최형국의 입술은 한숨을 가두었다.


"내 인생에  딱 두 번 그 어떤 기회가 있었어.

한 번은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해서 빚쟁이들에게 쫓기면서

살 때였고. 한 번은 아내가 갑자기 말기 암 선고를 받고 죽었을 때야.

두 번 다 내가 누군지 모르고 길을 잃은 상태였으니까!

사업을 하면서 부딪혔던 수많은 난관들은 시련 축에도 끼지 못해.

난 그런 불행의 순간이 그 어떤 기회라고 생각하면서 살았어.

내가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될지를 결정짓는 바로 그런 기회."


유문종은 최형국을 노려 보았다.


"야 최형국 돌려 까기 하지 말고 하고 싶은 말만 해"

"난 첫 번째 기회에서 악마와 손잡았어.

사람들 한테 무시받지 않고 사람답게 살기 위해 무슨 짓인들 하겠다고 다짐했지.

난 그렇게 돈을 모았어. 근데말야.가족이 무너지면서

다시  또 한 번의 기회가 왔어.

또다시 다른 사람으로 변할 수 있는 기회!"


유문종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머리 아픈 얘기 할 거면 하지 마 어차피 난 알아듣지도 못해!"


" 그러니까 난  예전의 최형국이 아냐. 난 죽었다고. 아무리 해도 너와 함께했던

과거의 나로 돌아갈 수 없다고."


혼란스러워하는 그녀를 지켜보던

최형국은 의자 옆에 가지런히 놓인 그녀의 명품백에 시선을 던졌다.


구찌 신상품이 나올 때마다 그녀의 손에 이끌려서 들렀던 명품 매장에서 산 가방이었다.

명품가방에 욕심이 많았던 그녀의 허영을 채워줄 수 있는 그의 지갑은 늘

그녀를 향해 열려 있었다.

그녀의  허영끼를 비난하기보다 허영끼를 채워주는 스스로에게 자긍심을 느낀다는 묘한

심리적 우월감을  처음으로 느끼게 해 준 여자였다.


 단 한 번도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 보이지 않았던 아내 김수경은 늘 손수 만든 검소한 가방들을 들고 다녔다.

하나부터 열까지  의미를 두는 그녀의 성격

때문에 집안에는  자신의 정성이 들어가지 않은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식탁에는 한번 오른 음식은 절대 오르지 않았다. 집안은 언제나 광이 났고,

먼지 하나 없었다.

언제부턴가 최형국은 술집 여자들하고만 잠자리를 하고  정갈하고 깨끗한 침대 위에 인형처럼 누운 아내를

안지 않았다.  집안의 모든 공간은 깨끗했지만 마음이 쉴 공간은 점점 줄어들었다.

하지만 아내를 사랑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완전히 다른 두 여자에게서 같은 사랑을 느낀다는 게 이상하리 만치 두 여자는 비슷한 점이 하나도

없었다.


최형국은 주변 여자들의 가방을 유심 히바라 보다가

전갑련을 떠올렸다.


"무슨 놈의 등산용품이 이렇게 바싼지"라고 이야기할 때의 그 표정이 떠올랐다.

그때 그녀의 의자 위에 걸린 가방이 기억났다.

이팝나무 아래 벤치에 앉았을 때도 최형국은 그녀의 가방을 바라보았었다.


아디다스가 아닌 아디 다소였다.  


아디 다소 등산가방은 손잡이가 다 헤져있었다..

얼마나 오래 들고 다니면 가방 손잡이가 다 헤질 수가 있을까?


그에게 힘든 시절의 향수처럼 아디 다소 면서 가방끈마저 헤져버린

그 가방의 주인인  전갑련의 인생을 생각해보았다.

자신의 가난이 부끄럽지 않고.  결점마저  자연스러운 당당함처럼 느껴지는 여자에게서

아름다움이 아닌 짠한 사랑 스러 움을 느낀 건  변화된 최형국의 인생에서 만나는

첫 설렘이었다.


아내에 대한 죄책감과 분노 원망으로 가득했던 마음은 낙원 여인숙에서 하룻밤

꿈처럼 녹여져 나갔다.

그의 성적 판타지는 낙원 여인숙에서의 뜨거운 밤보다도

그녀를 만나지 못하는 그리움이 더 커져만 갔다.

그녀의 해져버린  가방끈처럼  그녀를 다시 만나서  그녀의 어깨 위에  새로운 가방을

메어주어야만 그의 그리움이 채워질 것만 같았다.


최형국과 엤연인은  음악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말없이 앉아 있었다.

어떤 희망도 그들 사이에 끼어들 틈이 보이지 않았다,


이제 그들 둘만의 세계는 각자의 시간으로 쪼개져 가고 그들은 서로

뒤돌아 서 걸었다.


최형국은 사무실에 도착하자

연락처들을 뒤적거리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저 최정국입니다. 사무장님 부탁이 하나 있는데....

지난번 산행 때  술자리 후에 제가 명함지갑을 하나 주었는데... 돌려주어야 할 것 같아서요.

전갑련이라는 분 연락처를 좀 알 수 있을까 해서요...."

최형국은 거짓말을 했다.


"아 전갑련씨요? 잠시만요. 그분은 정회원도 아니고 회비는 입금했는데.. 연락처는

따로 없습니다. 다음 산행 때 혹시 올지 모르니까

그때 오시면 전해주시죠."

최정국은 다음 산행에서 전갑련을 기다렸지만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두 달이 넘도록 끈이 헤어진 가방끈 주인을 만날 수 없었다.



전주로 돌아온 전갑련은 혼자서 이사 준비를 마쳤다.

떠나기 며칠 전날 노모를 위해 저녁을 차렸고 밥상 앞에 앉았다.

이빨이 시원찮은 노모의 식사시간은 길었다.


" 엄마 나 이번 주에 서울로 이사할 거야!"


눈이 휘동 그래진 노모의 얼굴에 불안이 덮쳤다.

"이사를 한다고... 혼자서..."


"낼모레 외할머니 시제 끝내고 갈 거야!"

노모는 짧은 한숨과 함께  밥상에 수저를  던졌다. 밥알이 튀어 알갱이가 쏟아졌다.

"왜 내가 따라나설 것 같아서 상의도 없이 혼자 저지른 거야?"


"엄마 난 이제 내 인생 살고 싶어"


"누가 니 인생 살지 말라고 했니? 나라고 사는 게  편한 줄 아니?

나도 너만큼 힘들었어.  너 혼자 그 많은 빚 떠안은 거 아냐!

우리 식구들 모두 죽어라 일했어! "

전갑련은 눈을 감았다. 일그러진 주름에서 작은 한숨이 쏟아졌지만

고요했다.


"알아!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엄마의 귀한 아들 자랑스러운 아들 그아들의 앞날에

먹구름이 끼이면 안 되니까. 엄마의 그 헌신. 엄마의 그 귀한 아들이

그 사실을

반만 이라도 알아주었으면 좋겠는데... 어쩌지 엄마?

지금 그 아들은 지새 끼들 지마누라하고 사느라 우리 따위

죽어나가도  안중에도 없는데..."


"그럼 그때 네 동생을 감방에 보내서 앞길이 창창했던 인생을 망쳐놔야 속이 풀렸겠니?

난 후회 없다. 사채 빛이 아니라 내 새끼 살리기 위해서는

뭔짖이라도 했을 거야! "


"그만하자 엄마. 이제는 엄마를 원망하지 않아. 달수한테도 아무런 감정 없어.

이제 다 잊었어. 그러니까 엄마도 이제 자식들한테서 좀 독립하고 편하게 살아."

노모의 눈에서 일렁이는 눈물을 전갑련은 외면했다.

고개를 돌린 딸의 흰 새치들을 보면서 노모는

목이 메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이것아 돈도 한 푼 없이 어떻게 서울살이를 한다고 난리야?

지금 사는 집 전세라도 빼줄 테니 조금만 기다려"


그 말은 전갑련의 마음을 무너지게 했다.


"엄마 제발 쫌.... 이제 그만 좀 해.

 엄마는 어떻게 하려고?  내가 이래서 엄마가 지긋지긋해

이래서 벗어나질 못한다고....

제발 자기 자신만 좀 생각해....."


그녀는 파자마 차림으로  일어났다.

 이제 겨우 반만 비워진 밥상을 두고

그녀는  옷장에서 겉옷을 꺼내 걸쳐 입었다.

노모는 순간 두려웠다. 그녀는 늘 도망갈 궁리를 할 때면 옷부터 챙겨 입곤 했다.

어둠이 깔린 거리로 나온 전갑련은

 편의점에서 캔맥주를 사서 자리를 잡았다.

한 모금의 낮은 알코올은 쓰린 속을 잠시 마비시켰다.

 그녀의 모성은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장기라도 팔 여자였다.


이런 끔찍한 모성애 때문에 42 년을 욕망을 거세당한 작은 새처럼 모이를

물어다 나르며  살아온 자신을 잡고 또다시 새장에 가두려는 여자의 애정이

전갑련의 숨통을  다시 쥐어 비틀었다.


맥주를 한 캔 다 비우자   엄마에게 가려져 보이지 않던 거리의 풍경들이

시야로 들어왔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문구의 광고판을 보면서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선택 앞에서 용기를 내어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만을 위해 냉정한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몇이 나 되겠는가!

전갑련은 도망치고 싶은 생각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했었다.


하지만 도망칠 수가 없었다. 외할머니와 엄마는 자신의 둥지 속에 병든 새들이었다.

그녀 인생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둥지 안의 새들에게 웃음을 찾게 해 주는 것뿐이었다.

피 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했던가!  그녀는 그 말을 떠받들면서

고통도 즐기면서 지난 시간을 살았다.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진 그녀는

앞으로의 삶에 있어 자신을 지켜줄 든든한 동아줄은 바로

이 고통 속 시간들임을 확신했다.

끈적거리는 애정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녀는  둥지에 꺾어두었던 날개를 활짝 펼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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