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범자들이 가지는 연대의식은 그 연결고리가 튼튼하다. 박용재는 그 연결 고리가
강한 유대감으로 발전되어 루피나의 손길 사이로 남자들의 행열이 이어지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첫 단추는 어긋나 버렸다.
9시가 되자 새로운 손님들이 테이블을 채웠다.
빨간불 빛이 다시 파란 루피나 여신으로 바뀐 룸 안에는 그녀가 다시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두 명의 남자가 술을 마시다. 웨이터에게 신호를 보내고 한 남자가 루피나의 룸으로 향했다.
다시 긴 시간이 흘렀다.
기다림은 지루했다.
박용재는 당장이라도
루피나의 문을 열고 뛰어들어가고 싶었다. 30분 정도 흘렀을까.
남자는 또다시 넋이 빠진 걸음으로 자리로 돌아왔다.
그들은 몇 마디를 나누고 홀 안을 두리번거렸다.
남자는 연이어 술을 들이마시고 있었다.
잠시 후 또 다른 남자가 일어났다.
그가 향한 곳은 루피나 쪽이 아니었다.
카운터로 가서 계산을 끝내자 다른 남자도 함께 일어나 지옥클럽 출입문을 빠져나갔다.
박용재는 불안에 휩싸여 서둘러 손님들을 따라 나갔다. 그들은 도로에서 택시를 잡고 있었다.
"뭐 불편하셨던 거라도 있으셨습니까? 서비스 안주라도 드릴 테니 더 즐기다 가시죠?"
감색 양복을 입은 남자가 불안한 기색으로 말했다.
"사장님 이거 불법영업 이런 거 아니죠?"
"경찰들 한테 꼬리 잡히면 우리 모두 골로 가는 거 아닙니까?"
박용재가 여유 있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니 지옥클럽을 뭘로 보시고. 이 바닥 10년째입니다. 한 번도 그런 일 없었으니까!"
안심하시죠. "
"야 내가 뭐랬어 별일 없을 거라고 했잖아 괜히 졸아가지고...."
"서비스 안주는 담에 먹죠!"
그들은 택시를 잡아 타고 사라졌다.
홀 안으로 돌아온 박용재는 스트립걸들에게
오늘 서비스는 중단하겠다고
지시했다. 루피나 룸의 파란 불이 꺼지자 홀 안은 스트립쇼가 다시 시작됐다.
그는 전갑련의 방을 노크했다.
그녀는 그에게서 차가운 밤바람 냄새를 맡았다.
누가 먼저 말을 꺼내야 할까 둘은 서로를 염탐했다.
그녀의 옆에 바싹 기대어 앉은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상황에 적당한 표현은 아니지만...
이 바닥에서는 보통 머리를 얻는다고 하죠! 보통 첫 경험을 말이죠."
그는 그녀의 볼이 빨개지는 걸 보았다.
" 근데 이상하네요. 보통은 한 사람이 경험을 끝내면 다음 손님으로 이어져야 하는데...
손님들이 모두 여기서 나온 뒤로 일행들과 함께 술집을 나가버립니다."
그는 솔직하게 말했다.
" 무슨 문제가 생긴 건가요?"
"손님들이 아직 익숙하지 않은 거 같은데."
"........... 제가 좀 많이 부족한가 봐요"
박용재는 그녀의 붉게 변한 손을 보았다.
"근데... 두 번 다 30분이나 걸렸는데... 좀 너무 긴 거 아닙니까?
어떻게 생각하세요?"
"네. 시간이 그렇게 오래 걸렸다고요?
몰랐어요. 금방 그분 "
그녀는 눈을 천장으로 치켜뜨면서 아이처럼 웃음보를 터트렸다.
"아! 어쩜 좋아. 이런 얘기 하면 안되는데.
아까 그 남자 때문에 저 웃다가 손가락 쥐 나는 줄 알았어요.
계속 혼자 중얼거리는 거예요.
벽 너머로
조금만 더 천천히 아직은 아냐.
이런 느낌 처음이야 아 안돼.
제발 조금만 더 시간을 끌어 줘요. 이러는 거예요.
입을 봉하는 뭐 그런 건 없을까요?"
그녀는 심각해진 그의 표정을 보며 웃음을 그쳤다.
"그 남자는 빨리 끝내는걸 원치 않았어요. 근데 그 완급조절을 제가 해야 하는 거죠!
입에 넣은 사탕을 서서히 녹여먹고 싶은 아이한테 깨물어서 사탕을 주고 싶지는 않아요."
박용재는 단호한 어조로 잘라 말했다.
"시간이 길어지면 서로 힘들어져요. 이건 장사라고요. 선생님."
"용재 씨?"
그녀는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제가 왜 이일을 하겠다고 승낙한 줄 아세요.?
물론 지긋지긋한 사채 업자들 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무슨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았을 거예요. 몸 파는 일도 아니고... 제 손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고 하잖아요."
그녀는 작은 세면대 위의 동그란 거울을 보았다.
룸은 박용재의 세심한 배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의자는 편안했고 작은 탁자 위에는 독서대가 있었고. 일인용 소파가 하나 더 있었으며,
벽에는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이 걸려있고.
좁은 룸 안에는 작고 앙증맞은 세면대도 있었다. 좁은 공간은 예술적으로 필요한 모든 게 디자인돼 있었다.
"전 졸업하고 8년을 빚 깊는데 온 시간을 보내면서 살았어요.
하지만 아무도 저한테 고맙다는 말을 해 준 사람이 없어요.
그건 당연히 해야 할 당연함인 것처럼 취급당했죠.
제가 쓰지도 않은 그 빚은 가족이니까 당연히 갚아야만 했어요.
병원에서 하는 일도 마찬가지예요. 손님들은 선생님 선생님 하면서 고마워했지만
전 돈을 벌기 위해 정신이 없어서 그들이 진심으로 고맙다고 해도
전 아무런 감동 같은 게 없었어요.
제가 번 모든 돈은 다 사채업자들이 가져갔으니까요. 누구를 원망할 시간도 없었어요.
근데 이번엔 달라요. 내가 이일을 선택했고. 이손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전 일할 거예요. 제방 식대로요. 장사도 아니고 돈도 아니고 절 위해서요. 안 그러면 전 사채업자들한테 시달리던 그때나 지금이나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는 거예요."
그녀의 긴 호흡 속 이야기는 공간을 빨아들일 만큼 진지하고 명료했다.
노크소리가 들렸다.
"사장님 잠깐 좀 와주셔야겠는데요."
그는 홀 안으로 돌아왔다.
문 입구에서 두 명의 손님이 직원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사장님 우리 아까 왔었었는데... 입장료를 또 내야 합니까?"
그들은 첫 번째 손님들이었다.
"원칙상 한번 퇴실하면 입장료는 기본적으로 내셔야 합니다.
이건 영업규칙입니다. "
박용재는 단호했다.
그들은 머뭇거리더니 입장료를 다시 지불하고 테이블에서 맥주를 주문했다.
그리고 한참 뒤 박용재를 불렀다.
"저기 물 많은 여자 방에 불이 꺼져있네요. 끝난 겁니까?"
박용재는 그들이 머뭇거리면서 말하는 모습 속에서 그들의 마음을 읽었다.
"오늘은 마감했습니다. 너무 많은 손님들이 몰려서요. 시간을 다시 조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내일 다시 오시면 즐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일부터는 유료제입니다"
그는 냉정하게 할 말을 마치고 뒤돌아섰다.
그들이 뒤에서 낮게 소곤 거리가 소리가 들렸다.
"거봐 아까 하자고 했잖아! "
"그 새끼가 가자고 하니까 그랬지 혼자만 재미보고...."
박용재의 머릿속에서는 순간 팡파르가 터졌다.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제부터 루피나는 무료 서비스가 아니다. "
그녀는 사람의 근육 하나하나의 신경세포와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오묘한 쾌감의 극치를 찾아내어
마지막 한 방울의 쾌락까지 쥐어짰다.
그녀는 그녀의 방식을 고수했다.
그녀가 즐길 수 있는 시간까지 아이가 사탕을 녹이는 그 시간까지 함께 기다렸고 즐겼다.
루피나는 6개월 만에 지옥 클럽 어둠의 여왕이 되었다.
박용재의 예감은 적중했다.
3만 원에서 시작한 판돈은 오만 원으로 올라가고
십만 원을 웃돌았지만.
그녀를 찾는 손님은 늘어났다.
매출은 두배로 늘었고,
술의 기운이 아닌 맨 정신으로 그녀를 찾는 손님이 늘면서 루피나는 예약제로 바뀌어갔다.
밤안개의 가려진 입소문을 타고 사내들은 지옥 클럽 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그녀는 클럽 뒷문 비상구를 빠져나와 매일 새벽 두 시에 퇴근했다.
평범한 일상을 산다는 건 어쩌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생각할 시간조차도 없이 하루하루 시간이 간다는 걸 의미하는지도 몰랐다.
몸도 피곤하지 않았다. 병원에서 하는 일은 단순노동 같았고,
지옥 클럽에서의 그녀는 자유롭게 여름 들판을 날아다니는
풀잠자리 한 마리였다.
전갑련은 잠깐 병원을 휴직했다. 낮과 밤이 바뀌어 버린 생활에 적응하기 힘들었다.
지옥 클럽에서의 수입이 좋았고, 변화된 일상에 그녀 인생의 호사스러운 날들을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엉덩이 습진 때문에 며칠 일을 쉬고 나타난 제니를 갚련은 반갑게 맞았다.
"제니 너 어제 병원 갔다 왔어?"
"언니가 소개해준 병원 대박이야. 며칠 만에 엉덩이 피부가 말짱해졌어"
제니는 갑련에게 투피스 치마를 내려 엉덩이를 들이댔다.
멀리서 바텐더가 소리쳤다.
"지랄 아무 데서나 엉덩이 좀 들이밀지 마"
"뭔 상관이야 이걸로 밥 먹고 사는데... 병원에서도 간호사들이 나 같은 환자는 처음 본다고..."
그녀는 깔깔대며 웃다가 요정처럼 우아하게 갑년을 향해 한 바퀴 돌더니
"언니? 이 옷 정말 예쁘다 어디서 샀어? 요즘 뭔 일 있어 왜 이렇게 이뻐지는 거야?"
실눈을 뜨고 갑년의 핑크빛 원피스에 드러난 몸의 굴곡을 아래위로 훑었다.
"저 칙칙한 방에서 썩지 말고 언니도 봉체조나 한번 하는 게ㅡ어때?
내가 바로 그 밤의 여왕 루피나다 라고 하면서..."
그녀는 바텐더를 향해 말했다.
"야 언니 처음 여기 왔을 때 기억나? 난 새로 주방 아줌마가 온 줄 알았잖아?"
"근데 요즘 언니 보면 완전 다른 여자 같아."
"누나가 안 꾸며서 그렇지 주방 아줌마는 좀 심했다. 제니."
"요즘 언니 덕에 저승사자가 아주 콧노래를 부른다니까! 덕분에 우리도 매일 일할 수 있어 좋고..
저승사자가 짭새들한테 손을 썼는지 단속도 좀 잠잠해진 것 같고.... 아 이놈에 습진만 아니었으면 새 차로 바꿀 수 있었는데....."
"근데 언니 저승사자한테 얼마 받았어?""
제니는 얼굴을 가까이 대고 갑련에게 말했다.
"무슨 소리야 누가 그래? 내가 돈 받았다고?"
"뻔하지 뭐. 위험에 빠진 사람을 수렁에서 건지려고
저승사자가 매의 눈을 하고 다니잖아.
의리남 저승사자가 한번 물면 자기 사람 만드는 데는
시간 문제지... 저기 바텐더도 형님 아우 하면서 하늘같이 떠받들고..."
"언니도 뭔가 마음의 빚을 진 거 같은데 그럴 필요 없어.
언니는 언니 생각만 해. 그렇게 죽자 사자 일하지 말고"
음악이 깔리면서 지옥 클럽의 하루가 시작된다.
봄이 가을이 되고 가을이 겨울이 된다.
전갑련은 가계 맞은편 편의점에서 눈발이 날리는 12월의 저녁을
가볍게 컵라면으로 때우고 있었다.
롱코트를 입은 젊은 남자가 반쯤 식은 커피를 마시다 말고 핸드폰으로 시원하게 펼쳐진 겨울 설경 사진을 보고 있었다. 히말라야 어디쯤 돼 보이는 산맥들 꼭대기에는 등반가들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의 옆모습을 지켜보던 그녀는
석고상 아그리파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의 오른편에는 작은 안개꽃 다발이 놓여 있었다.
겨울날의 백합 한송이와 안개꽃은 같은 흰색을 서로 안아주듯 다른 색처럼 보였다.
그녀는 남자의 꽃다발에서 푸르른 청춘에게 질투가 났다.
꽃다발 주인이 될 누군가의 그녀가
되어본 적이 없던 자신의 청춘이 서러워 순간 안기 꽃다발을 던져서 짓이겨 버리고 싶은 맘이 들었다.
잠시 후 편의점 밖의 일행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그는 사라졌다.
그녀는 국물까지 먹어치운 뒤
서둘러 룸 안으로 들어왔다.
예약 손님이 없는 그날은 한가로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재즈풍의 음악이 들리고 춤추고 있는 무희들을 상상하는데
인터폰 소리가 들렸다.
" 손님입니다. "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손님이 루피나의 방문을 여는 순간부터 남자의 마음과 함께한다.
루피 나방은 완벽한 방음처리가 되어있었다.
발소리는 어떤지... 나이는 몇 살인지... 바지를 내리는 소리로 성격은 어떤지....
신음소리 하나하나로 그녀는 손의 리듬을 조절한다.
남자의 모든 것들이 모두 그녀의 시간 속에 들어온다.
시끄러운 음악소리도 멀어지고 남자는 조용히 의자에 앉아있다.
그녀는 기다린다. 남자가 그녀에게 모든 걸 맡기는 그 시간 그녀는 백합향이 퍼지는 오일을 손에 부드럽게 마사지했다.
잠시 후
작은 쪽지 하나가 구멍 속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흠칫 놀라서
오일이 종이에 묻을까 조심스레 받았다.
"당신의 시간을 저도 삽니다. 잊을 수 없었던 손에 고마움을 담아
오늘은 제가 당신의 손을 잡아드릴게요 잠시만이라도 저와 함께 이 시간을 누리고 싶어요."
누군가 장난을 하는 건지
그녀는 구멍 속을 들여다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구멍 사이로 나무줄기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안개꽃 줄기들이 가지를 구멍 사이로 넣더니
부끄러운듯 백합꽃 한 송이가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면서 구멍에서 툭 바닥에 떨어졌다.
그녀는 바닥에서 안개꽃 다발을 주었다.
눈에 익은 꽃다발은 설산을 바라보던
옆모습이
아그리파를 닮은 남자의 것이었다.
벽 너머에서 음악이 흘러나왔다.
안나푸르나 같은 설경이 펼쳐졌다.
굵은 남자의 저음은 감미로웠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의 All I ask of you는 그녀가 처음 듣는 음악이었다. 남자의 목소리는 손 털처럼 부드럽게 안개꽃이 되어 그녀에게 안겼다.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우연 속에 들이닥친 감동은 연둣빛 풀잠자리 색 같은
그녀의 유년 속 멈추어버린 행복이었다.
그 잊혔던 행복과 설렘이
룸 안에서 어지러이 날리고 갑년은 사랑을 꿈꾸던 소녀처럼 눈물을 흘렸다.
음악이 끝나고도 한참 동안 그렇게 침묵이 흘렀다.
남자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갑련은 음지에서는 꿈꿀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지금 아니 앞으로 남자를 사랑할 수 있는 뜨거운 마음은
언제나 끓어오르고 있다는 걸 알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