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아! 넌 날 지켜주는 따스함이구나!"
진화
"호르몬 때문이야. 호르몬이 변해서 그런가 봐. 갱년기 증상 정말 싫어.
낮에 아무런 이유 없이 심장이 두근거리고
불안해서 아무것도 못하고, 한참을 가만히 가슴을 움켜쥐고 있을 때가 있어.
밤에도 가끔 이런 증상으로 자다가 깨곤 해"
그녀가 두손으로 얼굴을 부벼대며 말했다.
나두 맞장구 쳤다.
" 과거에 나타나지 않는 증상들이
하나둘씩 늘어나니까... 맘이 약해져서 별별 생각이 다 들더라. "
" 그니까 언니 이번 추석에 친척들 모였는데, 죄다 아픈 얘기만 해
너무 우울한 것 같아. 언니는 어때?
힘들지 않아? "
그녀가 가끔 이런 대화로 표정이 어두워지면 난 조심스럽게 내가 생각하는
마음이야기를 꺼낸다.
" 난 몸이 힘들 때 불안감이 엄습하면
올라오는 불안한 감정들을 그냥 온전하게 느껴 .
그리고 이렇게 속삭여"
나는 잠시 그녀의 두 눈을 응시하다가
말을 했다.
"불안아 널 사랑해
넌 날 지켜주는 따스함이구나!"
그녀의 눈은 당황스러움과 어이없음이 교차한다.
" 무슨 말이 그래. 그게 말이 돼? 불안한 감정을 어떻게 사랑해.따뜻하다니 뭔 말이야?"
그녀의 이런 질문은 모든 사람들이 동일하게 하는 질문이다.
" 왜 사랑하면 안 돼 ?
불안한 감정을 사랑하면 안 된다는 법이 어디 나와있어?
자신의 모든 감정은 자신이 느끼는 거야. 남이 느껴 주는 게 아니라고,
내가 내 감정을 사랑하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어?"
그녀는 미간을 찌푸린다.
" 난 싫어 언니 심장이 벌렁거리는데 어떻게 그런 걸 사랑한다고 말해? 이해가 안 돼!
혼란스러워하는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 넌 불안감이 뭐라고 생각하니? 불안감의 원인이 뭐라고 생각해?
불안감 때문에 아파서... 불편해서.... 즐겁지않아서...
불안감이나 두려움의 본질 안으로 한번 깊숙이 들어가 본 적 있어?
그 불안의 본질은 바로 이타심의 시작이야. 사랑이라고.
내가 아프고 힘들면 가족들을 걱정시키고, 일도 못하고,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힘들고,
가족들에게 피해가 갈까 봐 힘들어하는 게
더 크잖아. 아프고 힘든 순간에도 나 보다는 사랑하는 사람을 더 생각하잖아.
너나 나 같은 어떤 인간은 그래. 고통의 순간조차도 주변 사람들을 생각하며 마음껏 아파하지도 못한다고.
그게 사랑이 아니면 뭐야?"
그녀의 눈빛이 흔들린다.
" 언니 말을 들으니 그런 것도 같네. 하지만 언니는 여러 가지 힘든 일들을 겪으면서 경험을 해서 그런 거고... "
그녀가 말끝을 흐리더니 이내 단호한 얼굴로 일그러지면서 고개를 젓는다.
" 하지만 너무 복잡해 그런 건 생각해 본 적이 없어.
그냥 호르몬 때문 이잖아. 갱년기 여자들 다 그렇다면서...."
그녀는 잠시 뾰로통해졌다.
내가 그녀를 야단친것도 아니고, 그녀에게 강요한것도 아니고, 단지 새로운 마음의 접근방식을 얘기 한것
뿐인데... 그녀는 복잡한 이야기가 나오면 손사레를 친다.
고요한 그녀의 마음 안으로 돌을 던진 걸까? 우리는 더 이상 대화를 이끌어 갈 수 없었다.
갱년기 여자들의 방정식 같은 호르몬의 변화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견고한 그녀의 생각에 혼돈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
다른 이야기로 화재를 돌렸다.
나는 나의 특수한 마음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한 번쯤 우리가 알고 있었던 아니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다 보니 한 번도 다르게 생각해 보지 않았던
마음을 조금 다른 방향으로 바라보려고 한 것뿐이다.
세상이 만들어놓은 것들 안에서 단단해져 굳어버린 자신의 편견을 조금 변화시켜서 보자는 것이다.
그녀는 불안을 사랑하자는 나의 말을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당연한 결과였다. 과정이 필요한 마음의 여정안에서 히스토리없이
결론만 들이댔으니 그녀가 황당해 하는건 당연했다.
감정을 차별하지 않고 느끼기 시작한건
마음공부를 하면서 무너지고 또 무너지면서
6년을 돌고 돌아 이제 겨우 알게 된 내 마음의 밑바닥에서 찾아낸 선물 같은 신기루였다.
어느날
불안하고 두렵고, 때론 걱정스러운 감정이 올라올 때... 그 답답하고 무겁고 어두운 감정
밑바닥에서 함께 느껴지는 따스한 온기가 스며 드는걸 감지 했었다.
딱 한번 이런 온기를 발견하고, 힘든 감정이 올라올 때마다. 함께 느끼고. 인식해 보았다.
바로 사랑이었다.
행복하고, 즐겁고, 감사하고, 감동스러울 때 나오는 이런 사랑의 감정과는 다르지만,
비슷한 느낌의 사랑의 감정이 베여 있었다.
고정되어 있던 관념을 깨고 모든 걸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기 위해 긴 여정의 길을
걸어온 지 오랜 시간이 흘렀다.
조금씩 변화하는 내 마음의 결을 따라갔다.
정말 위기의 순간 이제 뭔가 달라져 있겠지라고 기대하지만
내 마음은 또 제자리로 돌아와 과거의 힘듬을 되풀이한다.
하지만 분명 변했다. 힘듦 속에서 이제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는다.
묵묵히 다시 시작한다. 그리고 기다린다.
그런 와중에 내 감정들은 하나씩 진화를 한다.
내가 알지 못했던 감정들이 생겨난다.
과거의 자아들이 겪은 불행한 경험들 속에서 만난 감정들에게 일일이 이름을 지어주었다.
불안이 올라올 때는 찌글이라는 아이
두려움이 올라올 때는 덤벙이라는 아이
우울감이 올라올 때는 첨벙이라는 아이
회색빛의 감정이 올라올 때는 덤덤이라는 아이
이 이름들은 또 바뀐다.
이 아이들이 나타나면 오리라는 지금의 내가 나타난다.
오리라는 아이는 아무런 감정의 차별도 없고 감정에 휘둘리지도 않고
오로지 감정을 있는그대로 보고, 자기 자신그대로 존재하는 아이다.
아마도 태어날 때 순수했던 바로 나 그자체일 것이다.
오리가 나타나 하는 일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어려운 것도 아니다.
너무 쉬워서 하찮게 느껴지기도 한다.
오리는 그저 느껴 주기만 한다.
살아오면서 내가 만든 무수한 자아들.
내가 만들었지만 타자들속에서 만들어진 감정들이 만든
자아들에게 오리는 인격을 부여한다.
개망나니 에고 들이 아니다.
생생하게 느끼는 바로 소중한 나의 자아들이다.
즐겁고 편안할때는 우쭈쭈하면서
힘들고 무섭고 외롭고 지쳐있을때는
외면했던 아이들. 내가 배쳑하고, 거부했던
내면의 무수한 자아들.
이제는 아무것도 저항하지 않고, 거부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느껴 준다.
오리가 할 일은 이것만으로 충분하다.
괜찮다. 괜찮다. 내가 다 느껴 줄게......
그리고
어느 날
찌글이, 덤벙이, 첨벙이, 덤덤이, 피 칠칠이, 꺼무댕댕이,
이 아이들이 아주 조금
에너지를
마음속에 불어 주고 있었다.
그리고 속삭였다.
"난 사랑이야. 나를 바꾸는 힘은 너한테 있어.
언제나 새롭게 시작하자.
난 늘 다른 얼굴이야.
오리 너가
멈추지 않는다면
너에게 창조적인 감정으로 우린 변할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