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길을 잃다.

사랑.

by 토끼

다경의 집에 들어섰을 때.

오랜만에 그녀를 만났다.


화정이었다.


그녀는 나에게 눈인사를 건네며 두 눈을 살짝 찡그리며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어색한 몸짓으로

외투를 입었다.




"언니 오랜만에 만났는데 어쩌죠?

제가 좀

일이 있어서 먼저 좀 일어날게요 담에 밥 같이 먹어요."



"어 괞찮아 미리 약속한 것도 아닌데 뭐."


베이지색 블라우스에 스키니진 청바지를. 입은

그녀가 현관문을 나갈 때까지

내 시선은 그녀의 예쁘고 탐스런 엉덩이에 꽂혀 있었다.




"화정이는 늙지도 않아 여전히 예쁘네. 30대라고 해도 믿겠어.

요즘 많이 바쁜가 봐. 요즘도 신랑이랑 취미

밴드활동해?

드럼실력 많이 늘었겠다.?"




다경은 과일을 깎으면서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들썩였다.


"글쎄. 요즘은 밴드활동 안 하는 거 같던데...


언니 내가 얘기 안 했나? 화정이

내일부터 10일간 명상센터에 합숙한다고 준비할게 많아서 오래 못 있는다고 했어."


다경은 미리 얘기 안 한 내게 마치 자신이 미안하기라도 한 듯 변명하듯이 대답을 했다.


명상?


"응 명상센터 다닌 지 6개월 정도 됐을걸."


수치침 배운다고 하지 않았어?

언니 그게 언제 적인데 1년 과정 벌써 끝났어.

"아 그래 근데 무슨 명상을 10일씩이나 한데.....

신랑밥은?

애는 어쩌고?


"몰라 화정이가 알아서 하겠지."



"다경아 화정이 재는 좀 특이한 거 같아!

뭘 해도 좀 요란스럽게 한다고 해야 하나?

명상이 그렇게 거창 한 건가?

난 생활 속 명상이 최고의 명상이던데... 오로지 명상을 위한 명상은 잘못하면

집착을 가져올 수도 있더라!

중독처럼 깊이 빠져서 어떤 의식이 돼버리거든...,,"


"언니 그거야! 사람마다 다르지. 나도 2반 3일 코스로 해봤는데 엄청 힐링되는

시간이었어."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왜 화정이 얘기만 나오면 좀 과민하게 반응하는 걸까?

예쁘고 무슨 일을 해도 열정적인 화정을 질투하고 있는 걸까?"


혼잣말을 하고 잠시 생각 속을 빠져드는데

다경이 과일 접시를 내밀었다.


"언니 우리 과일 먹고 산책 나가자."


9월 초가을 시원한 밤바람을 느끼며

편의점에서 캔맥주 4개를 샀다.


"다경아 넌 화정이를 보면 어때

행복해 보여?


"어 화정이가 왜? 남편은 잘 나가는 대기업 연구원에 ,

아들은 중학교 3학년인데 대학생처럼 어른스럽지...

뭐 하나 빠질 게 없는데... 화정이가 무슨 걱정이 있겠어!

삶이 무료해서 저렇게 가만히 있지 못하는 거지"


왜 그래? 언니 화정이가 무슨 말을 해?


"아니 그냥 물어본 거야? 화정이가 뭔가 너무 열심인 게

난 열정처럼 보이지 않고 쫌 안쓰러워 보여서...."


술에 약한 다경은 두 캔을 마시더니 벌써 반쯤 취해서 벤치에 기대고 말했다.




"난 화정이가 좀 외로워 보여"


우리의 대화는

화정이 얘기에서 맴돌고 있었다.


화정이 이야기를 붙들고 있는 건 나였을지 모른다.

다경이는 분명 아무것도 모른다.

내가 알고 있는 혼자만의 비밀을.....


다경과 화정 우리 셋이 함께 한 시간도

어느덧 8년이 됐다.


다경은 화정과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였는데

어떻게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까?


그녀도 나처럼 입을 다물고 있을까?


다경이 가 모르는

이야기

그것은

내 기억 속에만 봉인 됐다.


그날 이후로 나는 화정을 보는 게 힘들어졌다.



내가 다경의 절친인 화정을 처음 만난 건

5년 전 이맘때였다. 친한 친구가 하는 밴드공연에

초대받았다고 함께 가겠느냐고 해서 마침 한가하던 차에 함께 공연을 보러 갔었다.


홍대지하 공연장안에는 젊은이들이 빼곡했다.

그때는 노는 거 하나는 빠지지 않았다. 공연이 중반쯤 접어들자.

소리새라는 밴드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존레넌을 연상케 하는 복장을 한 남자가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올드팝을 부르고 있었다.

"언니 내 친구야"저기

화정은 드럼을 치고 있었다.

70년대 디스코풍 의상을 입은 여자가 드럼연주를 하는데

멋있어 보였다.

보컬이 부르는 노래보다.

그녀의 드럼 연주에 빠져 마법에 걸린

사람처럼 넋을 놓고 말았다.

공연이 끝난 뒤 뒤풀이 장소에 함께 동석한 자리에서 화정과 인사를 주고받았다.



큰 눈에 하얀 피부

늘씬한 몸매의 화정은 한 번 보면 잊힐 리 없는 매력적인 얼굴이었다.


그녀의 남편 동석은 베이스 기타를 연주했다.

평 벙한 직장인처럼 보인 이유는 그가 대기업 직원이라는 선입견 탓인지도 모른다.

그는 조금 어둡고 말수가 적었다.


그 후로 화정의 밴드 공연 있을 때마다

구경을 갔고 나도 화정과 조금은 친해졌다.


2년 전 가을이었다.

그날 그 홍대클럽에서 우연이라는 시간이 겹쳐서

그들을 아주잠깐 보았지만, 기억만큼은 영원히

떠나질 않았다. 한 사람의 불행 속으로 발을 들여놓은

그 느낌은 끈적끈적한 감정이었다.


공연 중간에 화장실을 갔다 잠시 바람 쐬러 밖에 나왔는데. 옆건물 사이 틈새에서

키스하는 두 커플을 흘깃 보았다.

둘은 내가 있는 것도 모른 채 부둥켜안고 있었다.


등을 돌린 남자의 뒷모습이 낯익어 보였다.

그는 화정의 남편이 분명했다.


나는 놀라 도망쳤고

얼마나 가슴이 두근거렸는지 지하공연장으로

가는 계단을 헛디딜 뻔했다.


클럽 안에서 화정은 연주를 하고 있었다.



한참 뒤 클럽문을 열고

화정의 남편이 상기된 얼굴로

보컬리스트인 남자와 함께 들어왔다.


공연이 끝날 때까지 그녀의 남편을 주시했지만 여자는

떠났는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 이후로 아무런 질문도 할 수 없고 추측만 난무한 해석도 결론도 미스터리한 시간이 나와 화정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녀는 알고 있을까? 남편이 바람피우고 있다는 사실을......


불행의 시작을 예고하는 이 드라마 같은

비밀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

입을 닫기로 했다.



화사하게 웃고 있는 화정의 그 미소뒤의 쓸쓸함이

그녀의 남편 탓이라면


그녀도 남편의 외도를 알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언니 우리 화정이 얘기 그만하고

이제 집에 가지"


다경이 축축한 목소리로 내 손을 잡았다.


" 언니한테 안 한 얘기가 있는데

화정이 있잖아!

지금 이혼 준비하고 있어"


"뭐? 남편 바람피운 거 알았구나!"


" 언니도 알고 있었어? 어떻게?

화정이 얘기한건 아닐 테고."


" 그냥 우연히 알게 됐어. 화정이 신랑이 어떤 여자하고

키스하는걸 2년 전에 봤어.

그놈이 헤어지자고 한 거야."


다경이 긴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아냐 그런 게 아냐

그런 문제가 아냐! 갠 그걸 알고도

이혼할 생각은 없었어

화정이는 신랑을 사랑했고,

가정을 지키는 거보다 더

신랑을 사랑하고 있었나 봐.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게 받아들이기로 하고

계속 같이 살자고 화정이가 매달렸나 봐.

난 화정이를 이해할 수가 없어.."



나는 그녀가 명상을 하고 있는 모습이 떠올렸다.

자신의 마음을 추스리기 위해 그녀는

애쓰고 있었다.


" 화정이 미친 거 아냐?

지가 뭐가 아쉬워서. 그렇게 까지 하는 거야

바람피운 남자를 용서하고 살 수는 있지... 근데

바람 안 핀 남자는 있어도 한번 바람피운 남자는 없다는

얘기 있잖아. "


다경은 답답한 표정으로 말했다.


". 화정이가 곧 얘기한다고 했는데.. 그때까지는 언니만 알고 있어.

화정이 남편은 동성애자였어"


순간 머릿속이 얼어붙었다.

그때 내가 본 사람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다.


사람과 사람이 사랑하는데,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모르지만, 집착이 아닌 사랑이 있다면 어떤 사랑일까!

남녀가 아닌 한 인간을 그냥 사랑하고 그 사람 곁에 있고

싶은 마음은 언제나 고통과 책임이 뒤따른다.


부모와 자식

아내와 남편

친구와 애인

스승과 제자

남자와 여자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


지구상에 수많은 관계 안에서

사랑이란 이름으로 자리 잡은

사랑의 형태는 우리를 어떻게

행복하게 하고 불행하게 하고 있을까?


아무도 사랑하지 않아도

사랑받지 않아도, 행복한 사람이 있고,

반드시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을 받아야지만 행복한 사람이 있다.


지금 내 사랑은 어디에서 표류하고. 있을까?

누군가를 사랑하면

나에 대한 사랑이 점점 줄어들고,

나를 사랑하면 할수록 누군가를 향한

사랑은 점점 의미가 없어진다.


그 어떤 사랑도, 정의 내릴 수 없는 내 마음은

지금 사랑안에서

잠시 길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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