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락을 읽지 못하면 벌어지게 되는 일들.
사랑
사랑을 배타적 소유의 독점권이라고 했던가!
5년 전 작업실이 과천에 있을 때 6개월간 깊은 사랑에 빠졌던 일이 있었다.
점심때마다 늘 산책을 하다 비닐하우스 앞에서 만난 똥강아지 방울이다.
양제천을 사이에 둔 과천은 인적이 별로 없이 한산하다.
늘 혼자 산책을 다녔고, 그 녀석도 혼자였고, 나도 혼자였으니.
우리 둘은 외로운 영혼들이었고, 사랑에 빠지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었다.
2시 20분 방울이는 100미터 앞에서부터 꼬리를 흔들며 나를 반기고,
내가 다가서면 언제나 벌러덩 배를 보이고, 애교를 떤다. 비닐하우스 촌에는
개들이 많은데, 과천의 모든 개들이
방울이 같지는 않다. 매일 마주쳐도 으르렁대는 녀석이 있는가 하면,
소닭 보듯 쳐다도 안보는 녀석들이 많은데, 유독 방울이 이 녀석만 첫 만남부터
나에게 애틋하게 구애를 한 것이다. 물론 방울이란 이름도 내가 지어준 것이다.
방울이와 나만 존재했던 시간들이었다.
방울이는 마치 내가 산책하는 그 시간만을
위해 하루를 보내고 있는 듯 했고,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몸이 아프거나
나는 방울이를 보기 위해 기꺼이 출근도장을 찍고 산책을 나갔다.
6개월이란 시간 나와 방울이를 방해하는 그 어떤 존재도 없었다.
한 생명체와 이렇게 깊은 애정을 나눌 수 있다니.... 정말 경이롭고, 아름답고, 숭고했다.
그날 그 일이 있기까지는 말이다.
우리 둘 만이 존재하는 시간에 무슨 사건의 맥락이 필요하고,
방울이의 맥락을 읽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서로에게 절대적이었는데....
그날도 방울이를 볼 마음에 방울이 간식을 챙겨 산책을 나갔다.
멀리 방울이가 보이고, 방울이 앞에 낯선 등산복차림의 여자가 보였다.
그런데, 방울이는 나에게 했던 것처럼 똑같은 모습으로 그 여자에게 애교를 보이고,
심지어는 나를 아는 척하지도 않았다. 여자는 날 향해 비수를 꽂았다.
" 옴마야 얘는 처음 보는데도 어째 이리 사람을 좋아할까요? 애런 개는 처음 봅니다."
내 사랑 방울이는 그냥 개새끼였다.
그때, 그날 방울이의 실체를 알게 된 날, 엄밀히 말하자면 방울이의 맥락을 알게 된 날
나는 더 이상 방울이를 사랑하지 않게 되었다.
내 사랑이 얼마나 어리석은 거였는지... 알게 된 날 나는 내가 얼마나 바보인지
얼마나 맥락을 모르는 인간인지를 새삼 깨달았다.
그러니까 타인들과 주변인들의 맥락은 그리 잘 보고 파악하면서도
정작 나한테 닥치는 일에서는 판단력을 잃어버린다.
K라는 그녀의 일도 그랬다. 분명 그녀는 수많은 대화에서 자신의 맥락들을 다 보여주었다.
친언니와 싸웠다면서 한집에서 1년간 말을 안 하고도 지내봤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한 번도 K의 맥락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K는 내가 아는 한 가장 배려심 많고, 착한 사람이었고,
너그러운 사람이었다. K의 언니가 얼마나 이상한 성격이었으면 한집에서 1년을 이야기를 안 하고
지낼까 하는 생각만 할 뿐이었다.
K는 완벽주의자였다. 책임감이 강하고, 무엇보다 남에게
지적당하는 걸 병적으로 싫어해서 언제나 모든 일을 스스로 먼저 알아서 했고,
사람들에게 맞춰 주었다. 팀 내 모든 사람은 그런 그녀를 좋아했다. 내가 그녀를 특별히 좋아했던 이유는
내가 사고로 다쳤을 때 매일 병문안을 왔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말이다.
약간의 업부상의 일로 K를 조금 세게 푸시했던 일이 딱 한번 있었다.
그때 이후로 K는 나를 차단해 버렸다.
K는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맥락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싸우면 정들고, 실수는 누구나 하며, 문제가 생기면 서로 얼굴 보며 풀자 주의자였는데...
K는 문자 한 통으로 나와의 관계를 차단해 버렸다.
나는 수많은 사과와 시도를 하면서 K와의 관계를 회복하려고 노력했지만
그 문자 한 통으로 아무런 소통도 못해보고 그렇게 관계가 끝이 났다.
그 과정에서 K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엄청난 상처를 입은 사람은 나였다.
조금만 더 K라는 사람의 맥락을 파악했다면 쓸데없는데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았을 텐데...
이처럼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맥락이 중요하다.
공적인 자리에서 처음 만나서 나에게 호감을 보이는 사람에게 사적인 감정으로 푹 빠져 버리는
경우도 있다. 원래가 그런 맥락을 가진 사람인데... 날 좋아하는 걸로 오해해서 혼자
스토리를 쓰는 경우도 종종 있다.
평소에 농담도 잘하고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나에게 조금 모욕감을 주는 농담을 던졌을 때
그 사람의 맥락을 파악한다면 그 농담의 수위를 조절하고, 적당하게 대처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앞뒤맥락은 다 사라지고, 그 농담만 머리에 꽂혀서 상처받고, 관계가 끝나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다.
한 대상의 맥락을 읽으려는 것도 어쩌면 관심과 사랑이다.
천천히 그 사람을 알아가고 깊은 마음으로 들여다보는 관심.
나를 향해 뜨거운 애정과 관심을 주던 사람이 나의 거리 두기로 서서히 애정이 식고,
또 다른 상대에게 관심이 옮겨가서 다른 사람과 친하고, 서로 감정을 공유하는 걸 지켜보게 될 때.
조금은 섭섭하지만, 이 또한 우리들의 스토리 안에서 만든
맥락의 한 부분이다. 인간의 마음은 이렇게 견디고, 배우고 성장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사람을 사랑하는 방식이 조금은 바뀌고,
좋아하는 마음이 또 좋아하는 마음을 망치게 되는 나를 보면서 하나의 질서가 만들어진다.
나는 여전히 방울이에게 섭섭하고, K에게 상처받은 마음 그대로지만
앞으로 만나게 될 수많은 방울이와 K에게는 조금은 다른 애정으로 한 사람의
삶 속으로 들어가 서로에게 따스하고 아름다운 관계를 만들고 싶다.
좀 더 멋진 사랑을 만들면서 살아가는 사람.
그것이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유인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