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다.
다시 내게 주어진 생명.
새로운 삶이 주어질 때면, 내 형편은 조금 나아지거나 더 안 좋아지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리고 어떤 선택을 하든 마지막은 늘 허무하게 끝났다.
이번 생이 몇 번째인지 잘 모른다.
회차가 거듭되며 삶이 주어질 때 전생의 기억은 조금 남아 있지만 부분적으로 기억날 뿐이다.
모든 것이 다 떠오르진 않는다.
눈을 뜨면 항상 커다란 동상이 서있다. 그리고 그 동상은 매번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지금 내 앞에는 대머리에 긴 턱수염을 기른 남자가 수도승 같은 옷을 입고 있다. 그리고 입을 움직이고 있진 않지만 내 귀로 그의 음성이 들려온다.
"어리석은 자여, 네게 선택의 기회는 세 번 주어질 것이다. 기억하라, 그중 단 한 번만이라도 현명한 선택을 한다면 네 운명은 바뀔 수 있다."
내게는 대답할 권리도,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그리고 나는 당연히 그 운명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속으로 생각했다.
'단 세 번의 기회, 운명을 바꿀 수 있는 한 번의 기회'
목소리의 잔향이 귀에서 메아리치다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러고는 갑자기 주변이 캄캄해졌다.
발아래로 차원 문이 열리며 내 시야에 있던 모든 것이 소용돌이치듯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내 의식도 잇따라 그 안으로 스며들었다.
잠시 뒤 정신이 번쩍 들어 눈을 떴을 때, 내 눈앞에는 대머리 동상 대신 광활한 대지 위로 얕게 깔린 푸른 초원과 그 주위를 둘러싼 울창한 숲이 보였다.
푸른 벌판 위로 야생말이 달리고 있고 대지 주변으로는 기둥이 두껍지 않은 거목(巨木)이 빽빽이 자라나 있다.
사람의 움직임이 작은 점처럼 보이지만 그들이 살고 있는 집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이 광경을 하늘에서 바라보듯 내려다보고 있다.
'이번엔 어떤 생일까'
시선이 내 몸으로 향했다.
인간이다.
주먹을 쥐니 힘이 느껴진다. 굵은 팔에는 힘줄이 성난 듯 튀어나와 있다. 피부 아래 갈라진 근육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힘을 주지 않아도 긴장한 활시위처럼 팽팽했다. 몸이 조금 무겁지만 움직임이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온몸에서 힘이 느껴진다.
나를 관찰하고 있는데, 갑자기 땅에 발이 닿았다.
그리고 저 멀리서 고함 소리가 메아리치듯 들려왔다.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건 내게 익숙한 언어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와와와와! 오호호호! 이히!"
첫 번째 선택의 순간이었다.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갈지, 아니면 지금 이 상태로 혼자 돌아다닐지 선택해야 했다.
망설임 없이 무작정 그쪽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그 무리와 합류해야 했다. 그래야 의지할 곳 없는 내가 생존할 수 있을 터였다.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소리로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내게 닥치는 상황들은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상기했다.
대머리 동상의 말처럼, 내게 신호를 보내는 어떤 것이 운명을 바꿀지 모르기 때문이다.
소리에 가까워질 때쯤, 반경 500미터 너머 들소가 한 무리를 향해 달려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남자로 보이는 여러 명의 사람들이 손에 창을 들고 들소의 몸에 조준하며 들소 주위를 빙글빙글 돌고 있다.
한 명이 던지면 다른 사람이 유인하고 던진 창을 다시 주워 들어 또 던지는 방식으로 사냥을 하고 있었다.
민첩하게 움직이며 사냥하고 있는 한 무리들.
나는 그 무리에게 천천히 관찰하며 다가섰다.
뾰족한 돌을 얇은 나무 끝에 줄기로 묶어 창을 만든 것 같다.
반나체의 모습.
중요 부위와 사냥 시 다칠 수 있는 관절 부위에 가죽을 둘러 보호하고 있었고 목에는 이빨로 추정되는 뼈가 목걸이처럼 걸려있다.
하나같이 다부진 체형을 하고 있다. 그러나 체구가 작고 몸이 가벼워 창을 던져도 힘을 싣지 못하는듯했다.
무리에 가까이 다가섰지만 그들은 나를 쳐다보지 않고 경계도 하지 않는다.
오직 들소를 사냥하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나는 나를 시험해 보고 싶었다.
땅에 떨어져 있는 창을 집어 들었다. 처음 잡는 창이지만 왠지 모르게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원래부터 나의 것 같은 그런 느낌.
들소를 향해 소리를 지르며 창을 던졌다.
"으리야!!!!!!!!"
난 직감적으로 알았다. 창은 명중할 것이다. 그리고 얼마 뒤 예상대로 들소는 가슴팍에 내리꽂힌 내 창에 무력하게 쓰러졌다.
한 사람을 향해 달려가던 들소가 갑자기 앞으로 고꾸라지며 바닥에 쓰러지는 순간 그 무리가 일제히 나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자신들끼리 아는 언어로 대화하며 이상한 의성어를 냈다.
"우 우, 아 아, 꿍 꿍"
"우 우, 우, 우, 우"
"꿍 꿍, 꿍 꿍"
"아 아, 꿍 꿍"
"꿍 꿍, 꿍 꿍, 꿍"
한 사람이 경계하듯 나를 향해 걸어오더니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것 같았다. 나도 똑같은 포즈를 취하며 답례를 취했다. 나는 그의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다섯 번 이상 끄덕였다.
그렇게 그는 무리 안으로 나를 이끌었다. 그들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몸짓으로 알아들었다. 그렇게 나는 그들의 일부가 됐다.
내게 들려온 소리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고, 도움을 줌으로써 나는 그들의 일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일면식조차 없었지만 나는 순식간에 존중받는 위치에 올랐다.
그것도 창을 한 번에 적중시킨 것 하나로.
그 실력은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알게 됐다.
내게는 전사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야생동물과 맞닥뜨려도 숨이 붙어있는 한 이빨로 목을 물어뜯으며 죽어가는, 그야말로 짐승 같은 부류.
내 몸은 그 무리의 남성들과 달랐고, 들소를 사냥한 이후로 내 몸에 흐르는 피는 더 들끓었다. 피를 원했다. 전투 본능이 깨어난 것이다.
해가 질 무렵, 우두머리인 쿤이 갑자기 나를 불렀다.
근엄한 표정으로 모닥불 옆에 기다란 지팡이를 쥐고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듣자 하니 곰 사냥을 다녀오라고 했다.
나는 올 게 왔구나 했다.
아마 이것이 내 두 번째 선택일 것이다.
쿤 옆으로 용맹한 눈빛을 한 남자들이 여럿 서있었다. 하지만 그중 어느 누구도 쓸만한 구석이 없어 보였다.
한 남자는 기침을 하다 피를 뱉었고 또 다른 남자는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얼굴에 주름이 가득하고 움직임이 둔한 사람. 정신이 조금 이상해 보이는 사람까지.
몇 명은 그래도 데리고 갈 수 있을 것 같지만 절반 이상이 문제가 있어 보였다.
쿤은 그들을 모두 데려가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쿤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쿤은 거듭 데려가 줄 것을 부탁했다.
나는 계속해서 거절했다.
대신 체격이 좋아 보이는 사람 세 명을 골랐다.
다른 이들은 데려가게 되면 중요한 순간에 짐이 될 것 같았다. 위험한 상황을 피하려면 데려갈 수 없었다.
그리고 등을 돌리려는데 한 사내아이가 계속해서 자신도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다.
아직 신체가 다 발달하지 않은 어린 친구.
이런 녀석도 전사를 자처하는 상황이라니, 마음이 아팠다.
난 어린 친구를 향해 안된다고 죽을 수도 있다며, 오지 말라 했다.
그러더니 그 아이는 울면서 쿤에게 매달렸다.
쿤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그 친구도 데려가 달라 했다. 나는 당연히 안된다 말했지만 이유인즉슨, 그 아이의 아버지가 곰에게 피습을 당해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그 아이는 분노에 가득 차 있었고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 위해 곰 사냥에 자신도 데려다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 아이의 이름은 랖.
어딘가 무리의 남성들과는 달라 보이는 모습. 피부는 더 검게 그을려 갈색을 띠고 있고 머리카락은 숱이 많았고 거칠었다.
장발의 머리를 했지만 긴 머릿속에 가려진 눈빛만은 전사의 눈빛이었다.
부모가 다른 지역의 인종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린 나이임에도 조금 더 성장하면 강인한 신체를 가질 수 있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그런 아이를 지금 데려가 희생시킨다면 쿤에게도 큰 손실임이 분명했다.
나는 쿤에게 가족을 먹여 살릴 식량을 마련하고 싶다면 랖을 우수한 전사로 키워야 한다 말했다.
쿤은 조금 고민하더니 결국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아마도 쿤은 랖에게는 분명 전사적 기질이 있어 보였고, 설령 내가 있지만 남자 네 명으로는 곰을 잡을 수 없을 거라 판단한 모양이었다.
나는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쿤에게 어떤 염려도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세 명의 남자에게 내일 아침 동이 트면 쿤의 움막 앞으로 모일 것을 당부하며 우리는 각자 흩어졌다.
다음 날 아침.
나를 포함한 네 명의 남자는 곰을 잡으러 깊은 숲으로 향했다.
넓은 초원 끝자락에 숲이 벽처럼 서 있다.
우리는 천천히 발걸음을 맞춰 걸었다.
발밑으로 마른 잎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주변으로 기둥이 얇은 나무들이 성기게 서있었다.
아침 햇살이 잔가지 사이로 흘러내려 피부를 간질였다.
숲 중앙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가면서 공기가 서서히 달라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숨이 무거웠다.
긴장한 탓인지, 아니면 걷는 것이 힘든 것 때문인지, 기후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젖은 흙냄새와 썩은 나무 냄새가 뒤섞여 콧속으로 파고들었다.
습기를 머금은 땅은 푹신했다. 발을 디딜 때마다 축축한 진흙이 발바닥을 잡아당겼다.
거목들이 머리 위로 기둥처럼 솟아 있었다.
두 사람이 팔을 벌려도 감싸지 못할 굵기였다.
판자처럼 퍼진 뿌리가 땅 위로 튀어나와 길을 가로막았고 잎과 잎이 겹쳐 하늘을 가리고 초록빛 어둠이 내려앉았다.
밝은 빛이 점점 잘려 나갔다.
어디선가 인기척이 들렸다.
우리는 말을 하지 않고 서로의 눈빛을 교환했다.
보이지 않는 새가 짧게 우는소리가 들렸다 잠잠해졌다.
숲은 소리를 삼키고 있었다.
바람은 없었지만 나무 잎사귀가 부대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쥐 죽은 듯이 발걸음을 내디뎠다.
내 앞으로 진흙 위에 발자국이 깊게 찍혀 있다.
부러진 가지.
긁힌 나무껍질.
짙은 짐승의 냄새.
틀림없다.
곰의 영역이다.
내 손에 쥔 창이 조금 더 무겁게 느껴졌다.
숲은 살아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배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크르르르..."
곰이 우는소리가 들렸다.
진흙 바닥 밑으로 울려 퍼지는 무리의 발자국 소리를 곰이 들은 것이 분명했다.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 순간, 인기척이 사라졌다.
우리는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뭐라도 있을 것 같은 생각에 몸에 잔뜩 힘을 주고 있었는데, 혹시 사라진 것인가, 하는 찰나의 생각이 스쳤고 어깨와 가슴 쪽 근육을 당겨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던 동료 한 명이 몸에 쥐고 있던 힘을 풀었다.
바로 그때.
"훅-! 쿠어!!!"
내 눈앞에 서있던 동료 한 명의 머리통이 한순간에 날아가 버렸다. 머리가 그대로 잘리면서 소리 한 번 지르지 못하고 그의 몸은 들소처럼 바닥에 앞으로 고꾸라졌다.
곰은 자신의 영역에 침범한 것에 화가 났는지 고꾸라진 몸을 이빨과 손으로 찢고 뜯어냈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고 뜯긴 목과 복부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내장을 한입 베어 물어 씹으며 주변을 성난 듯 두리번거렸다.
한 명이 곰을 향해 힘껏 창을 던졌다.
창이 곰의 몸통에 맞고 그냥 튕겨져 나왔다. 또 다른 한 명은 곰을 유인했다. 민첩한 몸놀림으로 곰에게 소리를 지르고 돌을 던졌다.
곰은 꼼짝하지 않고 멀뚱멀뚱 그를 쳐다보더니 "쿠어어어!" 포효하는 소리와 함께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는 짧은 공간에서 도망치다 나무 위로 도망쳤다.
그는 곰이 어떤 동물보다도 민첩하고 날렵하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나무 위로 올라가려는 그의 발을 곰이 물었다. 아킬레스건이 찢겨 나가면서 그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곰은 발을 좌우로 비틀며 뜯어냈고 그의 발 한 쪽이 떨어져 나갔다. 겁에 질려 비명을 지르다 패닉 상태에 빠졌는지 그는 몸이 뜯겨나가고 있는 상황에서도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의식을 잃었거나,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이제 남은 건 나와 동료 한 명.
그는 이미 넋이 나가있었다.
눈이 풀려 있었고 허벅지를 타고 다리 밑으로 소변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팔 다리를 벌벌 떨며 들고 있던 창을 바닥에 던졌다. 그러고는 얼마 안 있어 주춤거리더니 뒤돌아 뛰기 시작했다.
결국 끝에 남은 것은 나 혼자였다.
내가 저 곰을 잡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애초부터 알고 있었다.
나는 이번 생도 틀렸구나 하고 생각했다.
랖을 데리고 왔어야 했던 걸까
누구도 살아남지 못할 거라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는데
왜 다른 사람들을 배제시킨 걸까
쿤의 말을 들었어야 했나
내 삶은 다시 시작되지만 그들의 삶은 한 번뿐인데
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은 걸까
어차피 생명이 다시 주어져서 그런걸까
머릿속으로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스쳤다.
그래도 끝까지 싸우다 죽을 심산이었다.
곰은 더 크게 포효했다.
나는 곰이 두 시체를 뜯어 갈기고 있는 동안 몸을 숨겼다.
곰이 땅을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더니 내가 있는 쪽을 향해 땅을 쿵쿵 울리며 다가왔다.
"퍽-"
순간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아까 도망친 동료가 돌아온 걸까, 생각했지만 그럴 리 없다. 겁에 질려 도망친 이가 다시 돌아올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나는 곰이 있는 쪽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랖이었다.
길고 얇게 깎은 돌을 긴 창 대신, 짧고 굵은 나무에 달아 나이프처럼 생긴 것을 손에 들고 있었다.
랖은 나무 위에서 돌을 들고뛰어내리며 곰의 머리 위를 강타했고, 곰이 충격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순간을 틈타 칼 같은 돌로 곰의 눈을 찔렀다.
"허어어엉!"
곰이 고통 속에 몸부림쳤다. 한쪽 눈에 의지한 채 곰은 랖을 향해 달려들었지만 허공에 손을 휘둘렀고 랖은 이를 재치있게 피했다.
수차례의 공격 끝에 곰은 가만히 자리에 서서 랖을 노려봤고 랖은 내가 숨어있는 쪽을 바라봤다.
나는 모습을 드러내 곰을 함께 잡을 심산으로 랖을 향해 걸었다.
"훅-! 쿠어어어어!"
나는 그 순간 전의를 상실했다.
랖의 머리가 내 다리 밑으로 빠르게 굴러왔다.
처음 마주한 곰보다 더 큰 흑곰이 나타났다.
우리가 처음 상대한 곰은 랖의 아버지를 피습한 곰이 아니었다. 바로 내 눈앞에 두 다리로 서서 포효하는 흑곰이었던 것이다.
용맹하게 싸우던 랖이 처참하게 죽어버리자, 그 순간 나도 곧 죽겠다는 생각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두 손을 꽉 쥐었다.
흑곰을 바라봤다.
어떻게 될지 결과를 알면서도 나는 흑곰을 향해 뛰어들었다. 나를 향해 휘두르는 손을 피해 다리 밑으로 뛰어들어 뒤에서 곰의 등을 타고 올랐다. 곰의 털을 손으로 꽉 쥐고 진흙에 젖은 발을 털에 디디니 올라가기 수월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등 뒤에 매달려 있는 것이 전부였다. 살기 위해서는 그렇게 꼼짝 않고 붙어있어야만 했다.
곰의 심장도 가쁘게 뛰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흑곰은 미친 듯이 포효하며 으르렁거렸다. 그러길 몇 분, 아무리 몸을 흔들어도 떨어지지 않는 나를 체념하기라도 한 걸까, 곰은 격렬하게 흔들던 몸을 멈췄다.
곰의 머리 위로 올라가 눈알을 뽑아내려는 심산으로 팔을 뻗고 다리를 올리려는데 뭔가 이상했다.
다리에 감각이 없었다.
그런데 팔은 계속해서 올라가고 있었다.
이상하리만치 가뿐하게.
나는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내 몸통 절반이 진흙 바닥에 떨어진 채, 처음 마주했던 곰이 내 다리를 뜯어먹고 있었다.
흑곰이 멈춘 것은 사냥이 끝났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내게 전사의 피가 흐르든, 쓸만하다 생각된 사람들을 불러 모아서 가든, 복수심에 불타오르든 야생의 자연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내 의식은 희미해져 갔다.
팔 끝까지 전해지던 힘이 점점 약해졌다.
그렇게 이내 내 몸도 바닥으로 떨어졌다.
곰이 내 심장을 발로 짓이기는 모습 뒤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마지막 내 모습은 무력함 그 자체였다.
매 회 느끼는 것이었지만 이번 삶도 허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의식이 없어지고 주위가 다시 캄캄해졌다.
다시 내 발아래, 차원 문이 다시 열렸다.
그런데 이번에도 눈앞에 똑같은 동상이 서있다.
동상이 내게 물었다.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여기서 멈출 것인가.
돌아가려면 내게 오라,
멈추겠다면 그 자리 그대로.
더 이상의 회차는 없는, 마지막 선택일 것 같은 직감이 들었다.
나는 매번 반복되는 이 허무한 삶을 끝내고 싶었다.
나는 동상 앞으로 걸어가 그의 발아래 오른손을 가져다 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