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kyo Working Holiday _ Two Jo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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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에서 보낸 두 달이 지나고 첫 월급을 받은 나는 샴푸를 샀다. 비누 한 장으로 모든 걸 해결하던 일에서 벗어났을 뿐인데, 고귀하게 느껴지는 향기와 우아하게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에 금새 문화 사회인이 된 기분이 되었다. 그동안 나는 꽤나 능숙하게 호떡을 굽게 되었고 점장님의 도움을 받아 통장도 개설하였으며 하루의 스무시간쯤을 공유하는 단짝 친구도 생겼다.
“워킹 홀리데이를 계획하는 저에게 결국 지나면 먹고 사는 일에 치여 다같은 아줌마가 되는 것 뿐이라는 조언을 하더라구요. 그러니까 튀려 하지말고 사서고생 말고 안전하고 편안한 길을 가라구요. 그게 어때서요? 어차피 나이가 들게 된다면 전 재밌는 일을 많이 겪었던 이야기 많은 아줌마가 되고 싶어요.”
비슷한 환부를 지닌 우리는 그렇게 과로에 시달리고 밤엔 맥주를 기울이며 서로를 연민하며 신오쿠보에서 워홀러 신분을 호기롭게 탕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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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오오쿠보는 제 2차 세계대전 종료 직후 일용노동자나 조선인 및 중국인들이 철교 밑 무허가 판자촌에서 집을 짓고 살았던 것에서 시작되었다. 1950년에 재일 한인 교포 신격호씨가 신오쿠보 역 근처에서 롯데제과 공장을 설립한 뒤일자리를 얻고자 한 한인들이 모였다. 환락가인 가부키초, 동경의 부도심인 신주쿠에서부터 시작된 고층빌딩이 늘어서 있는 한 편 임대료가 비교적 저렴하여 한국인을 대상으로 하숙업과 음식점 개업이 늘어났다. 2000년대 한류 붐 이후에 이 곳을 찾는 일본인들이 늘어나고 “코리아타운”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한국의 음식과 노래방, 카페, PC방, 유학원뿐 아니라 한국 아이돌의 음악과 패션, 화장품 등이 관심을 받게 되며 더 다양해졌다. 그 인기에 신오오쿠보 내에서만 활동하는 한국 보이밴드들도 생겼다. 그들이거리에서 공연 홍보를 할 때면 일명 대포 카메라를 들고 자지러지는 소녀들이 뒤따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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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의 모두가 무엇인가로 변장해 있던, 덩달아 쭈뼛쭈뼛 분장을 해야했던 알바생에겐 고달픈 할로윈이 지났다. 호박 모양 파운드 케이크는 80% 할인 팻말을 목에 걸었다.
“기간이 지나면 저렇게 되는거야. 어리고 건강할 때 더 놀아야해.”
같이 길을 걷던 언니가 건조하게 말을 꺼냈다. 바닷물은 바다를벗어나는 순간부터 썩기 시작한다. 달큰한 향기의 믹스커피는 피아노 선생님의 쿰쿰한 입냄새가 된다.
움직이자,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
메뉴판의 사진들이 빛이 바랜 낡은 가게에서 라멘을 후루룩 대며 야식을 해결했다. 사막에서 방금 온 낙타처럼 맥주를 호쾌하게 들이키던 그녀를 바라보다가 면줄기만큼이나 많은 재밌는 생각들이 떠올랐다.
다음 날 눈을 뜨자마자 집 앞 이자카야에 전화를 했다. 면접 후 원고지에 연필로 한 자 한 자 눌러 가게의 룰을 지키겠다고 다짐하는 글을 적고 나니 출근 시프트가 배정되었다. 불량하게 질끈 대충 묶은 머리 두건에 발목까지 오는긴 일식 앞치마, 주방과 홀에서 동시에 터져나오는
“이롸앜솨이뫄쉐이(いらっしゃいませ、어서오세요)”
는 밝고 유쾌한 인사는 내게 일어난 일이 너무 대단해서 믿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름이 어렵다하여 ‘나니짱’으로불리웠다. 한국에서 익숙했던 ‘(망)나니’의 별명을 그대로 쓴 것이었는데 불리울 때마다 늘 내 걱정이많던 언니 오빠들이 떠올랐다. 또 이름과 어울리게 잘 일을 벌이고 있군.
화려하고 보드랍고 달콤한 일식 안주들과한 모금씩 맛보는 각종 일본 술에 황홀하게 취해 저녁 일곱시부터 아침 다섯시까지 시부야의 이자카야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잠시 눈을 붙이고선 아침 아홉시부터 저녁 6시까지는 호떡 가게의 아르바이트를 하는 카케모치(투잡)의 일상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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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동경에는 겨울이 오기 시작했다. 가벼운 옷차림을 좋아하는 나는 쌩하니 면 티 한 장 입고 “와 추워 추워” 하곤 했다. 특히 움직이다보면 금새 뜨거워진 콧김과 훅 들이마실 때의 차가운 공기가 만나는 순간을 정말 좋아한다. 낯선 것에 신명을 내고 처음 보는 것에 힘을 얻으면서 진흙길, 가시밭길 마구 밟으면서 깔깔 웃어댈 나이였고 그런 나였다. 많은 것을 해내는 그 에너지가 어디서 나왔냐고 물어본다면 ‘진짜 웃긴 사람들과 핵재미있는 일을 해’라고 말해 줄 것 같은 때였다. 밤을 새고 놀며 하는 일투정도, 하나하나 몸으로 배워가는 일도 재밌었다.
한 달쯤 지나거의 매일 아침에 목이 부었지만 대수롭지 않은 감기 기운으로 넘겼었던 것이 시작이었다. 일을 마치고 누운침대에서 나는 숨을 쉬기가 힘들었고, 3세에서 8세가 앓기쉽다는 ‘폐쇄성후두염’ 진단을 받았다. 이름도 무시무시한 그 병을 앓으면서 나는 몸에게 계속 사과를 해야했다. 아픈건 내가 날 돌보지 못한 잘못이었다. 신발끈 졸라매고 흙탕물 튀겨가며 달리는 일은 즐겁지만 무리는 역시나 무리였다. 나에게도 그건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고 인정하는 일은 속상했다. 콧물이 잠시도 쉬지 않고 흘러서 휴지를 콧구멍에 말아 넣고 일하는 나에 대한 양해를 손님들께 구했다. “죄송합니다. 저희 가게 수도꼭지가 고장이 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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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자카야에서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나는 패자가 된 기분에 괴로웠다. 상실에서 지혜가 자라난다. 가벼움과 무거움, 슬픔과 즐거움 사이에서 중용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만큼 조금 불완전함 속에서 고통을 겪어보는 것도 괜찮은 일이다. 돈과 시간 그리고 무엇보다 낯선 곳에 적응하는 노력이 많이 필요한 워킹홀리데이에서 중요한 것은 스스로 목적성을 정하는 것이다. 마음대로 되는 일도, 계획한 대로 되는 일도 없는 세상에 그런 게 굳이 필요하겠냐 싶어 되는대로 떠나온 내게도 그것을 고민해야 할 시간이 왔다. 돈이냐, 어학습득이냐, 아니면 문화 체험이냐. 처음부터 꼼꼼히 돌아보아야 했다.
‘목적없는 삶은 느린 자살’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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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커뮤니티에서 사진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연락을 했다. 마음이 맞아 사진 작업을 함께 하기도 하였다. 도쿄에서 전문학교를 다니는 일도 꽤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의 전문학교는 보통 2년제로 졸업 후 바로 실무에 투입이 가능하도록 기술 실습 위주의 수업이 진행된다. 기술과 전문성이 없어 취업난에서 밀리기 쉽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어온 상경계 졸업생인 내게 기회일지도 몰랐다. 장학금 제도도 잘 되어있고 현지 취업 알선을 해주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제과, 조리, 금속 공예, 패션, 메이크업, 애니메이션 등으로 유명한 일본의 전문학교 중에는 사진으로기회가 많은 곳도 있었다. 눈자위가 뜨끈 눈 앞이 뿌얘진다.
투잡으로 번 돈을 들고 한국으로 돌아가서 조금 늦은 취업준비를 시작해야할까 아니면 여기서 또 처음부터 부딪혀 볼까.
그녀는 감정에 충실했으며
자신의 직관을 어리석을만큼 턱없이 신뢰했다
그녀는 고래의 이미지에 사로잡혔고
커피에 탐닉했으며
스크린 속에거침없이빠져들었고
사랑에 모든것을바쳤다
그녀에게 '적당히'란 단어는 어울리지 않았다
-천명관, 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