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나게 열심히 해 버림

일본에서 OL로 살아남기/ 실패한 날들을 그리워 할 수 있으려면,

by 조서형


GONZO

어떤 메일을 받았다. 인크루트 사이트에서 내 이력서를 보았으며 면접을 보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온갖 가능성과 불안함 속 이미 한 물류회사에 출근이 결정 된 다음이었다. '가능성 열어두기'의 몹쓸 취미를 가진 나는 면접에 참석했다. 당일 받은 질문 중에는 “당신이 가진 당신의 곤조는 무엇입니까, 그 예를 들어줄 수 있습니까?” 가 있었다.

여기서 곤조라면, 근성이나 고집을 뜻하는 말이겠다. 평소에 기미도 없다가 인생의 위기 때면 우악스럽게 튀어나오는 그것? 오토바이를 처음 샀을 때 서울에서 포항까지 밤새 내려간 일, 다친 몸으로 호치민에서 하노이까지 오토바이로 올라온 일,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을 다 챙기느라 학교와 아르바이트 사이 92시간을 내내 깨어있던 일, 회사가 바빠 23시간 연속 근무를 하던 눈물 바람의 날들이 끝도 없이 떠올랐다. 결국 무슨 이야기를 꺼낼까 고민하다가 "아르바이트를 매우 많이 했습니다."로 일단락 시켜 버렸다. 아쉬움에 면접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는 이마를 탁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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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일까? 확실히 실패는 ‘재미의 어머니’이긴 하다. 남의 억울한 실수만큼 재밌는 얘기도 없다. 고통 받았던 리얼한 후기는 인생의 맛을 더해주는 조미료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그렇다면 일을 그르친 경험은 나를 성공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 걸까? 폭발할 것 같은 열정으로 덤벼들었다가 축 처진 어깨로 돌아나오던 경험들은 시간이 지나도 그대로 상처로 남아 있었다. 시간을 돌려 그 때로 돌아간다 해도 더 잘 해낼 순 없었을 거니까 후회는 아니다. 아니지만 왠지 지난 실패의 나날들은 여전히 떠올릴 때 마다 알싸한 고통을 선사하고 있었다.

합격 통지를 받았으나, 마냥 좋아할 수 없었다. 지금 기분이 업되면 떨어질 때 충격이 더 클 거야. 기뻐해서는 안돼. 다 좋지만은 않을 거야. 상처받고 싶지 않아. 나는 몸부림 치고 있었다. 혼란은 왜 끝이 나지 않는 걸까.


실패는 넘어지는 게 아니라,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실패는 넘어지는 게 아니라,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거래." 드라마 '으라차차 와이키키' 에서는 동생을 위로하기 위해 이 문장을 사용했다. 그리고 뒤에서 "이런 손 발 오글거리는 말은 대체 누가 만든 거냐."며 투덜거렸다. 나는 얼마든지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새로운 시작은 언제든지 할 수 있지만 어느덧 마음가짐은 실패자의 것과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빅데이터를 다루는 스타트업의 주니어 마케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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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투르게, 소중하게

밤새 심장 박동소리를 듣느라 출근 전 날 밤을 뜬 눈으로 지샜다. 사무실은 긴자역 근처에 있었다. 정장을 입은 분주한 구둣걸음 사이에 나도 서 있었다. 어색한 기운을 뿜어내며 오전 일정을 마쳤다. 점심에는 카레에 치킨카츠 토핑을 얹어 먹었다. 그리고 스타벅스 신메뉴 아몬드라떼를 마셨다. 오랜만에 양껏 먹어 소화가 안됐다. 퇴근 시간이 지나도 남은 업무를 보느라 더부룩하던 배에서 곧 안쓰러운 꼬르륵 소리가 울려퍼졌다. 야근이 휘몰아쳤다. 밤에는 긴장이 덜 풀려 깊은 잠에 들지 못했다. 주말엔 탁! 하고 끈을 놓친듯 쓰러져 내내 잠만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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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퀴렐 교수님도, 올리벤더씨도 저를 알고 있어요. 그러나 저는 마법의 일은 아무것도 몰라요. 그런데도 왜 저를 위대한 존재라고 기대하죠? 유명하다고 해도, 제가 유명하다는 것 말고 저는 아는 게 없어요.
해리. 걱정마. 모두 알게 될거야. 다들 호그워트에서 하나부터 시작해. 괜찮아, 있는 그대로. 큰 일이라는 건 알아. 근데 말이야, 호그워트는 즐거워. 나도 즐거웠어. 지금도 사실은 즐거워.



해리 포터도 아닌게 선택이 되었다

출근길에 지하철에 낀 채로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 앞 쪽에 나오는 해그리드와 해리의 대화를 읽었다. '빅 데이터'라니 아는 게 하나도 없다. 대체 나를 직원으로 뽑았다는 사실부터 얼굴이 화끈해지며 혼란이 일었다. 모든 게 큰 거짓말은 아닐까. 해리 포터도 아닌데 나는 선택되었다. 하나부터 시작하는 지금이 불안하지만 즐거울 것이다. 그럴 것이라고 말해주는 해그리드가 옆에 없으니 스스로 다독이며 매일 아침 의심을 누르고 출근할 수 밖에 없었다.

시간은 약이다. 벅차던 업무량도 시간이 지나니 꾸역꾸역 받아 먹을만하다. 심지어 욕심이 생긴다. 시키는 일 이상으로 잘하고 싶다. 칭찬받고 싶다. 인정받고 싶다.

"인정을 하고 싶든 그렇지 않든 우리는 연습한 대로 연주해요. 하루에 여덟시간을 연습했습니다. 살아남으려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두 배 더 준비해야 해요." 아흔을 넘긴 현직 피아니스트, 시모어 번스타인의 말을 읽으며 거, 까짓 것 잠을 좀 줄이고 집중을 더 해 보자고 마음을 먹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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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

일본의 수도, 도쿄에서 OL이라 불리는 Office Lady, 회사원이 되었다. 여전히 생활태도는 방구석에 머물러 있었다. 내가 근무하는 회사는 작고 젊어서 유연한 편이었지만, 일본에서 회사 생활을 하려면 비즈니스 매너를 숙지하는 것은 필수다.

일본사람의 명함에는 휴대폰 번호가 없다. 공과 사의 구분이 확실하다. 영업사원의 경우 휴대폰이 따로 제공된다. 출근 할 때, 락커에 개인 휴대폰과 소지품을 보관한다. 밥을 우르르 몰려서 같이 먹으러 가지 않는다. 일본에서 일하는 한국 사람들에게 “처음엔 혼밥이 가장 적응이 어려웠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사생활을 공유하거나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분위기가 아니다. 개인주의가 강한 만큼 책임은 각자가 진다. 그래서 권한과 책임이 명확하다. 각자 도장을 가지고 다닌다. 택배나 재고 관리 서류 등 나를 거쳐가는 서류에 모두 도장을 찍어야 한다. 일을 지시 받으면 기간, 방법, 분량 등 최대한 구체적으로 질문하여 철저히 확인한다. 중간보고를 자주 한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경우에도 같다. 각자에게 큰 책임감이 부여된다.

지각을 하게 된 경우 꼭 메신저 등에 보고한다. 전철이 늦었다면 1분 단위라도 역에서 지연증명서를 받을 수 있다. 도쿄에선 월세와 교통비 그리고 잔업수당이 일반적이다. 회사와 개인이 서로에게 철저하다. 견적서 등을 보낼 때 아직까지도 이메일이나 팩스 대신 우편을 이용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더 많다. 뜨겁고 습한 도쿄의 여름엔 검정색 자켓까지 꼿꼿이 챙겨 입은 회사원들이 정말, 정말 많다. 불편하고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실수보다 안전함을 선호하고 매사에 신중한 일본 문화를 이해한다면 금새 적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업무 메일을 보낼 때는, [안녕하세요.]로 시작하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쓰면 된다. [늘 신세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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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로 진화

“시부야 교차로에서 잃어버려도 네 껀 알아보겠다.”

4년 전에 산 맥북 에어는 어디든지 들고 다녔고 얼마든지 스티커를 붙였다. 같이 보낸 몇 년 사이에 주인과 똑 닮은 꼬질꼬질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회사의 첫 날, 핑핑 돌아가는 단정한 맥북 프로를 제공받았다. 공기처럼 방향도 무게도 없던 나도 드디어 프로로 진화하는 것인가.

프로그램을 여러개 동시에 돌렸을 때, 순간적으로 노트북이 소리를 내며 뜨거워질 때가 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CPU가 팽팽 돌아가느라 발생한 열을 식히려고 팬이 돌아간다고 알고 있다. 매일 잠을 설쳐 점심을 먹고 나면 혼이 빠지도록 졸리고, 야근을 할 때면 배고픔에 지쳐 자주 제 정신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두개골 속 CPU는 부지런히 작동하고 있었다. “여기서 재밌는 점은~”, “~한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도 재밌을 것 같고.” 등의 회의시간에 나오는 이야기를 듣는 건 설렜다. 뇌가 팽팽 돌아갈 때면, 긴장감에 이마가 뜨거워지고, 눈알이 빠질 것처럼 되었다. 아직 입을 열 짬이 안되어 발생한 열은 출구를 찾지 못했다. 과열된 채 집에 가는 길에 한 숨 돌리곤 했다.

기술을 총동원하면서, 무엇을 해야 할 지 알면서, 어려운 과제에 집중할 때처럼 즐거운 경험은 없다. 발견의 과정에 포함된 흥분과 놀라움에 만족하는 이는 아무리 많은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충족감을 준다.



다음에 괜찮을 수 있으려면,

밤새 엑셀과 파워포인트가 등장하고, “괜찮습니다.”라는 잠꼬대를 한다. 여섯시에 알람을 맞춰두면 5:58에 눈이 떠진다. 추가로 공부할 자료들을 보물처럼 안고 퇴근한다. 침대에 앉아서도 용어집을 뒤적인다. 거대한 피곤에 짓눌린다. 오토바이 한 대가 시원하게 바람을 가르고 지나간다. 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만 쉴 때는 머릿속에서 일을 지워내라는 조언을 받았다.

그나저나 다시 오토바이를 탈 수 있을 날이 올까,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까. 회식을 마친 회사원을 실은 택시 사이를 달리는 오토바이는 보기만 해도 좋다. 오토바이를 타는 기분은 죽여준다. 헬멧을 쓰는 그 순간부터 비장한 표정을 한다. '까딱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어.' 겨울에는 손이 얼고, 여름에는 손등이 탄다. 길이라도 안 좋을라 치면 주먹에 왈칵 힘을 주어야 한다. 그럼에도 오토바이 위에서 무리하던 시간들을 좋아했다. 문득 그 때 그렇게 지겹도록 타 둬서 정말 많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나가는 오토바이를 보며 맘껏 그리워 할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


많은 일을 효율적으로 하려고 태어난 사람이 어디 있을까. 우리는 모두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이 세상에 등장했다. '더 많이 더 잘하려고 욕심을 내지 말자'라고 후련하게 생각해 버린 날도 있었다. 대신 '좋다'는 생각을 아주 많이 하기로 했다. 민첩하게 치열하게 새로운 가능성들을 맞이하되 많이 배우고 많이 감탄하며 살고 싶다.

아! 고군분투하는 오늘을, 사람들을 응원한다. 인생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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