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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서형 Oct 23. 2021

① 여기까지 온 걸로 이미 반 됐어요.

나머지는 저절로 끌려 갈 걸요.

    처절한 운동신경을 나는 진작 눈치 채고 있었다. 아는 건 어렵지 않았다. 기회가 도처에 널려있어 모를 수가 없었다. 학생 때는 체육 수업과 체육 대회가 있었고, 방과후 활동으로 발레, 농구, 테니스, 수영, 골프, 검도, 체조, 댄스 스포츠를 경험하며 몸 쓰는 일의 어려움을 느꼈다. 그 와중에 태권도는 통뼈에 맷집이 좋은 내게 잘 어울리는 운동이었다. 잘하진 못해도 즐거웠다. 진작에 맞는 운동을 찾았음에도 10년 만에 도장에 돌아온 데는 핑계가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니, 태권도를 배울 곳이 마땅치 않았다. 태권도장은 으레 예절과 운동신경을 기르고 아이들의 넘쳐나는 에너지를 소비할 기회를 주는 최고의 보육기관으로 여겨진다. 그만큼 아이를 대상으로 한 도장은 많지만, 성인이 규칙적으로 운동을 할 수 있는 곳은 흔치 않다. 운동은 집이나 회사에 가장 가까운 데 있어도 피곤하면 가장 먼저 내팽개쳐지는 일이다. 멀리 있는 도장을 다니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땀에 젖은 채로 지하철을 타야 한다면 발길이 닿지 않을 거고, 직장인 대상 취미반 태권도장은 친목 도모가 우선인 것 같아 부담스러웠다. 무엇보다도 '바쁘다바빠 현대사회'에서 효율적인 운동으로는 모름지기 헬스장과 크로스핏이 최고니까.

   



    태권도장을 가지 않을 이유가 이만큼 있었다면, 태권도를 시작해야 할 계기도 있었다. 직장 선배가 올림픽 태권도 경기를 보고 호기심을 가진 것이다. 선배 집 근처에는 스무 살 때 다니던 태권도장도 있었다. 한참 업무가 바쁘던 시기였지만, 선배는 호기롭게 바로 오늘 등록하자고 멱살을 잡아 끌었다. 퇴근하고 어색한 발걸음으로 태권도장 문을 열었다. 

    익숙한 파란 매트 바닥에 통이 큰 하얀 바지를 입고 맨발로 섰다. 적당한 긴장감이 생길만큼 띠를 꽉 묶었다. 공격 기술엔 '악!' 기합을 넣고, 준비 자세로 돌아올 땐 심호흡을 하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미트를 제대로 맞추면 시원하게 팡! 소리가 났고 엇나가면 딱, 하는 소리가 났다. 동작이 끝나고 나면 눈을 맞추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나눴고, 운동이 끝나면 태극기를 등지고 서서 복장을 정리했다. 내가 그토록 좋아하던 태권도장은 이렇게 가까이에 그대로 있었다. 

    개운하게 운동을 마치고 도복바지를 입은 채로 집에 가는 나를 보며 사범님이 물었다. "근처에 사시나 봐요?" 그제야 걱정이 몰려왔다. 사실은 제가 지하철을 갈아타면서 열 몇 정거장을 다녀야 하는 거리에 살아요. 그런데 3개월을 한 번에 등록하면 도복을 준다고 하는 말에 혹해서 한꺼번에 등록을 해버렸어요. 업무가 들쭉날쭉인 일을 하고 있어서 바쁠 때 몰아서 바쁜데, 제가 3개월을 잘 다닐 수 있을까요?

    사범님은 뭘 그런 걸 걱정하냐고 했다. 여기까지 온 걸로 이미 반은 됐어요. 태권도장에 안 와도 될 수 백 개의 이유를 이기고 등록했잖아요. 나머지는 앞의 반이 끌어줄 거예요. 자연스럽게 끌려 나오시면 됩니다. 걱정 마세요. 즐거울 거에요. 

    즐거울 것이다. 걱정할 필요도 없이 아주 즐겁게 태권도를 할 것이다. 그동안 그랬던 것처럼 태권도장에 나오는 일은 내게 많은 즐거움을 줄 것이다. 선배의 충동으로 3개월을 등록한 일로 이미 반이 완성되었으니까 나머지는 걱정할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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