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너지드링크 Dec 02. 2021

제가요?  그 집  남편이랑?

핑계 아닌 핑계

나의 대학교 시절.

동네에서 30분 거리에 영어의 명가  S 어학원이 있었다.

종로에도 좋은 학원이 많았지만 이 학원 시스템은 영어에 몰입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기에 인기가 많았다.


수업 시작 전과 후에 어학실 같은 곳에 들어가  피킹 연습을 하고, 수업 시간에도 말하기 위주였던 곳.

그때까지도 아침잠이 많은 나였지만 영어를 먹어버리겠다는 일념으로 학원에 등록했다.

사실  영어 공부가 재미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얼마나 열심히 사는 분들이 많은지, 대학생인 나에게는 큰  자극이 되었다.

회사원 A 씨는 아침부터 영어 공부 후 출근을 하고,  B 언니는 공인회계사 준비도 하면서 영어공부까지 했다. 다들 너무 열심히 사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이 어학원은 대신 독특한 문화가 있었다. 들어는 봤나? 선착순 추첨!

침 일찍 가서 번호표를 받아야 다음 단계 등록이 가능했다.(지금처럼 전산 시스템이 없던 시절이기도 하고 그곳만의 로열티(?)를 유지하는 절차였다.)

내 옆 자리 회사원 A 씨가 부탁을 했다. 마침 회사 출장이 잡혀 번호표를 신 좀 받아달라고.

어려울 것도  없는 부탁이기에 나는 흔쾌히 그 부탁을 들어줬다.

그 당시는 삐삐 세대라서(나이 나온다ㅋ)  A 씨는 내 삐삐 번호를 적어갔다.

다음날이던가~~ 내 삐삐에 모르는 번호가 찍혔다. 아무 생각 없이 전화를 걸어본 나.

"여보세요~"

"야, 이년아~~ xxcccc  xxx "


진짜  생전 처음 들어보는 오만가지 욕을 다 들었다. 듣고 보니 A 씨의 부인이었다. 영어 배우러 간다고 하고 나가더니 웬 번호가 적혀있고 그게 마침 내 번호였 것이다.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고 생각한 게 확실했다.

21살 대학생인 나는  당황하기도 하고 놀라기도 해서 그 자리에서 펑펑 울기 했던 것 같다.

너무 화는 나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다. 같이 수업을 듣고, 그냥 번호표 받아달래서 받아준 것뿐인데 내가 사십 대 아저씨랑 뭘 했다고!


다음날 수업시간에 나와 마주친 A 씨는 아무 말도 안 했다.

나도 다음날부터 그 어학원에 나가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영어학원은 다니지 않았다.

영어는 나에게서 그렇게 멀어졌다.


오늘 친한 언니의 페북에서 외국인과 댓글로 의견을 나누는  글을 읽고, 갑자기 이 사건이 떠올랐다.

핑계 같지만 이때부터 영어에 관심을 끊었던 듯^^


지금 같으면 억울하다고, 내가 뭘 어쨌냐고 말할 수 있을 텐데 예전의 나는  겁 많고 어렸다. A씨도 사과 한마디 없었고 그 부인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생각해도 상식 이하의 사람들이었다.


아이가 학교에서 영어를 배운다. 에서 공부하라고 하지 말고 같이 공부를 시작해야겠다.

나는 이제 당당하게 틀린 것은 틀렸다고, 억울한 건 억울하다고 말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  

영어도 핑계 대지 말 한 단어라도 시작해볼까?


작가의 이전글 시리, 그녀의 선택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