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8살 그녀의 흔적

라테는 말이야

by 에너지드링크

깜놀했다.

오늘 어떤 글을 쓸까 고민하다가 브런치 작가의 서랍(글 저장 기능임) 속에서 2020년 1월에 저장해 둔 이 글을 발견했다.


오늘 드디어 폭발하고 말았다.


8살 큰 아이의 학습지 세장.

진짜 앉아 있는 걸 싫어하는 큰 아이에게 딱 하루에 학습지 세장만 하기로 약속을 했다.

일 마치고 와 오후 여섯 시부터 하자는데 갑자기 딸이 그림을 그리겠다고 한다.

이제 그림을 그리고 나니, 밥을 먹고, 밥을 먹고 나니 만들기를 해야 한단다.

모든 일을 끝내고 씻기까지 했다. 여덟 시가 되자 내 인내심은 한계에 달했다.


"이젠 같이 할 시간 되지?"

"아니, 나 그림 그릴 거야."

"야~~~"


순간 소리를 꽥~~ 지르며 를 내고 말았다.


"엄마 때는 말이야. 할머니(엄마의 엄마)가 공부하거나 숙제하라고 말한 적도 없어. 넌 겨우 세장, 그것도 같이 하자는데 자꾸 이렇게 미룰 거야!"


그리고는 내 화를 못 이기고 방문을 닫아버렸다.

문을 닫고 분을 삭이다 보니, 내가 요즘 꼰대들이 쓴다는 '라테는 말이야'를 남발했구나.

저 어린 녀석에게~


학교 다닐 때 나는 공부를 꽤 잘했고, 신랑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우리 둘에게서 나온 딸은 반드시, 필연적으로 공부를 잘할 줄 알았나 보다. 남들 다 선행 학습시킬 때 애들은 놀아야 한다며 하나도 안 시키다가 뒤늦게 일곱 살에 시킨 한글 공부.

기대는 산산이 부서졌다. 도통 한글에 관심도 없고 노는 것만 좋아하고. 저 녀석이 우리 애가 맞는지 화도 나고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졌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 화의 대부분은 숙제를 안 하면 학습지 선생님한테 내가 혼날 것 같고, 내가 남들 보기 부끄럽다고 생각하는 것 때문이라는 깨달음이 왔다.

내 머릿속에서 내 아이가 잘할 거라는 막연한 자신감은 도대체 어디서 온 걸까.


태어났을 때 건강하게만 자라라고 빌고 또 빌었는데, 이제 초등학교 들어간다고 안 시키던 공부를 시키고, 못한다고 윽박지르고~ 생각할수록

내가 다 잘못했다.


혼자서 오만 생각에 빠진 그때, 방문 문틈으로 가 쓱쓱 밀려 들어온다.

흑. 여전히 한글이 서툴고 관심도 없는 녀석. 너란 여자 어떡하.

나도 모르게 웃고 있다.


잠시 후 문을 여니, 큰 아이가 천진난만하게 묻는다..


"엄마, 혼자 만의 시간 갖고 화 풀렸지?"

"그래. 넌 재능 있는 것 같으니 그림이나 그리자. 넌 크게 될 거야."


그래. 뭐라도 먹고살겠지.

일어나지 않은 일 걱정 따위 잊자.


저러던 녀석이 이번 해에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다.

여전히 공부는 안 좋아하고 :) 그림 그리거나 상상력을 발휘하는 놀이는 좋아한다.

넉살은 좋아서 동네 꽃집 언니. 붕어빵 아주머니. 와플집 알바 언니. 편의점 사장님과도 친하다.

나름 팬 관리인지 하교 후 저곳 중 한 곳에 들러 인사를 하고 오는데 그걸 목격한 엄마가 한소리 한다.

"나윤이는 어딜 가도 살아남겠!"

그래그래 널 믿어보마.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