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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너지드링크 Jun 15. 2021

계약직으로 살아간다는 것.

 계약직으로라도 일할 수는 있지만.

약학 대학 졸업!!! 나도 드디어 돈을 벌 수 있다!

졸업 후 목표는 오직 빨리 돈을 버는 것이었다. 마케터로 일했던 첫 직장을 퇴사한 지 5년이 지난 후였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인가?


나는 다시 회사에 가고 싶었다.      

처음 간 회사는 일본계 제약회사인데 나는 20대 1의 경쟁을 뚫고 학술부에 뽑힌 단 한 명의 신입 사원이 되었다. 그런데 입사 후 1주일 동안 사내 교육을 하더니, 업무 배치받기 하루 전날, 향후 1년은 인천에서 영업직으로 뛰어야 한다는 조건을 알려 주었다. 면접이나 공고 어디서도 없던 조건을 내걸었고 계약직 영업사원으로 뛰다가 능력을 보고 학술부에 옮길 수도 있다고 했다.

인천까지 다니기에는 왕복 네 시간의 압박이 내 앞길을 막았다.  그곳 퇴사 후 몇 달을 강제적으로 쉬다가 결국 다른 회사에 합격했다.


두 번째 회사는 미국계 제약회사로 CRA(clinical research associate)라는 임상시험과 관련된 업종의 임상시험 담당이 주 업무였다.

임상시험은 몇 단계로 나뉘는데 나는 임상 3상 시험을 위한 프로토콜 작성과 임상시험 개발계획 수립에 참여했고 PMS (post market surveillance) 4상 업무라는, 즉 시판되고 있는 약에 대한 임상 업무를 다른 위탁업체와 연계하여 진행하는 일도 도맡았다.

외국계 회사만의 자유로움, 예를 들면 출근 시간을 선택할 수 있고 영어 배움을 위한 학원비, 자기 계발비를 지원해 주고 휴게실에는 항상 간식이 있는 문화는 정말 멋졌다.

 하지만 아무리 유망직종이라지만 자기에게 안 맞는 일은 어려운 법, 사무실에 앉아 글씨 하나가 틀려도 계속 수정하고 엄청 꼼꼼하게 하나하나 살피는 게 내 적성에 맞지 않았다.

오히려 마케터 시절 시장조사를 핑계로 외근하고, 제품에 대해 홍보와 판매전략 수립하던 것이 이 일에 비하면 나은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가리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은 일단 해보았는데, 이 일은 내가 해본 비정규직 중 가장 생소한 ‘파견 계약직’이라는 일이었다.   

   

소속은 A 회사이고, 나는 외국계 회사 B에 파견 계약 형태로 들어가 일을 하는 시스템이다. 일은 똑같이 하지만 급여는 A 회사에서 나오며, 내가 들어간 외국계 회사 B는 이메일에도 non_B@B.com 이런 식으로 확실히 자기 회사 사람이 아님을 강조했다.

일은 과도하게 많았고 매일 영어로 하는 회의가 있었다. 영어를 못해 스트레스를 받는 와중에도 ‘이 회사 직원도 아닌데 왜 내가 이 일을 하지?’라며 의미를 찾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나는 4개월 만에 이 직장도 나왔다.

‘나는 정말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직장에서 파견 계약이라고 날 차별해~’

이런 식으로 자기 합리화를 시켰다.

해보고 싶은 일이 있으면 계약직이든 파견 계약직이든 마다하지 않았지만, 막상 들어가면 계약직이라고 이렇게 차별하나?’하는 억한 마음이 늘 생겼다.     

지금 직장도 계약직과 정규직 차이 없이 일도 비슷하고 월급도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정직원의 자녀만 어린이집을 이용할 수 있고, 퇴직 연금 등을 넣을 수 있는 단체 가입에 제한이 있다.

아직도 계약직이라는 이름 앞에는 당신들은 여기까지만’이라는 빨간 줄이 있는 것은 확실하다.

     


늘 정규직으로 일하던 언니가 다른 곳으로 옮기면서 처음으로 계약직으로 이직을 했다. 같이 들어간 4명 중 3명은 2년 계약 후 정규직이 되었고 딱 한 명 언니만 계약 종료로 퇴사했다. 한번 계약직으로 빠지니 이제 정규직 자리는 가기가 더 어려워졌다.

언니의 계약 종료 이유는 간단했다. 술자리에서 언니는 상사의 심기를 건드렸다고 했다. 살짝 추태를 부리는 상사를 밀쳤는데 취한 척하던 상사는 그 일을 기억하고 다음날, ‘너 두고 보자. 내가 너는 정규직 절대 안 시켜줄 거야 ’라고 했단다.     

해보고 싶은 일은 계약직이라도 해보는 것을 추천한다. 하지만 계약직이라고 너무나 쉽게 사람을 자르거나 제약을 두는 문화는 없어져야 한다.

지금 세대의 장래 희망이 공무원이라는 것도 평생 잘릴 일 없이, 퇴사 때까지 보장받고 싶어서일 것이다. 


지금은 계급 세상이 아니다. 회사에서 파견 계약직이 병, 계약직이 을, 정규직이 갑인 세상이라면 계급 세상이나 다름없다.

계약직이든 정규직이든 제대로 일하고 제대로 평가받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그림: 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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