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 유리문이 열리는 순간 훅 더운 열기가 몸을 휘감는다. 후끈하고 습한 공기에 절로 입꼬리가 올라간다. 버스를 갈아타러 가는 판에게 잘 가라며 손을 힘차게 흔든다. 그녀도 나만큼이나 열심히 팔을 휘젓는다. 제임스는 벌써 나갔는지 보이지 않네. 치앙마이에 도착했다.
올 상반기에는 직장에서 일이 많았다. 부장님이 병가를 내셔서 그 대리를 하는 바람에 내 일이 두 배가 되었고, 다른 부서의 사람들에게 일 처리를 독촉해야 하고 반려하는 일이 자주 생기면서 직장 동료들에게 불편한 말을 전해야 하고 어색해지는 상황도 생겼다. 퇴근해서 집에 오면 월말 부부인 남편의 빈 자리까지 더해 독박육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을 먹고 치우자마자 거실에 잠깐 앉았는데 어느새 잠이 들었다가 새벽에 화들짝 깨어 집안일을 마무리하고 직장서 가져온 일을 좀 보다가 새벽잠을 잠깐 자고 출근하는 날의 반복이었다. 간절히 혼자 있고 싶었던 나는 친정엄마에게 일주일만 초등학생 아이를 봐 달라고 부탁을 하고 충동적으로 치앙마이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당일에 무슨 일이 생기면 돌아올 수 있는 거리 중 가장 먼 곳이라 생각했다.
며칠 후 인천공항에 허둥지둥 도착해 체크인하고 배정받은 자리는 3열의 가운데. 창가에는 한 아시안 젊은 여성이, 복도 쪽으론 중년의 아시안 남성이 이미 앉아 있었다. ‘된장…. 눕코노미를 기대했건만 낀 자리라니. 성수기는 성수기로군.’ 익스큐즈미를 웅얼거리며 백팩을 가슴팍에 앉고 좁은 가운데 자리를 게걸음으로 들어가 앉았다. 그렇게 다섯 시간 동안 밥도 안 나오는 LCC에서 나는 앞 좌석 등받이만 멀뚱멀뚱 보며 시간이 어서 지나가길 바랐다.
착륙 한 시간 전 승무원이 입국서류를 나눠 주었다. 가방에서 펜을 꺼내어 내용을 기재하는데 따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왼쪽의 여성이 날 쳐다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배시시 웃었다. ‘이 기운이 다가 아닌데….’ 오른쪽으로 고개를 휙 돌리니 남성도 나를 보고 같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뭐지? 둘이 아는 사이인가? 근데 왜 둘 다 날 보고 웃는 거지?’ 눈이 마주치자 이내 그들은 시청허가를 받은 것마냥 이제 대놓고 내가 종이에 써넣는 영어를 고개를 디밀고 뚫어지게 바라봤다. ‘아항, 펜이 필요한 게로군!’ 펜을 든 손을 흔들며 “펜?”하고 묻는데 여자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자신의 입국서류를 내밀었다. 남자는 아예 내 테이블에 자신의 입국서류를 쓰윽 디밀었다. 뭐지? “잉글리쉬 노?” 둘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잉글리쉬 노다. 당신들은 파트너 운이 없구먼.
스피드 퀴즈 1번 문제 국적. 나는 자신을 가리키며 ‘코리안’ 했다.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유 코리안” 했다. 아니, 아니 그게 아니고 나를 가리키며 코리안, 그녀를 가리키며 you!를 외치자 여자가 손뼉을 치며 자신을 가리켜 ‘미얀마’라고 했다. ‘아항 미얀마 사람이구나. 아띠…. 근데 미얀마 철자가 뭐야?!’ 대충 발음 나는 대로 서류에 적어 넣었다. 남자는 당당하게 자신도 답을 말할 수 있다는 표정으로 가슴을 펴고 “차이나!”를 외쳤다. 응, 그건 내가 자신 있게 쓸 수 있자.
2번 문제 여권번호. 으이? 이건 몸으로 어떻게 표현하지? 악! 머리를 쥐어뜯었다. 1번부터 여권만 있으면 채울 수 있는 문제가 많았는데 여권을 볼 생각은 안 하고 몸으로 말해요 게임을 하고 있었다니 나의 멍청함이란. ‘패스포트!’를 외치자 양쪽의 게임 파트너는 일사불란하게 가방을 뒤져 여권을 찾아냈다. 여성은 미얀마 여성 판, 남성은 중국 남성 제임스였다. 나머지 칸들은 여권을 보고 대충 작성한 뒤 우리는 마임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판은 이십 대로 일본에 있는 베트남 식당에서 일했다. 체류 기간이 끝나 고국으로 갔다가 다시 일본으로 일하러 나갈 거란다. 한국 경유 비행기가 싸게 나왔고 치앙마이에서 육로로 8시간 정도 더 가면 고향 집이 나온단다. 엄마 사진을 보여주면서 가슴을 꼭 쥐었다가 놓았다. 자기가 보낸 돈으로 지은 집을 자랑스레 보여주며 가장 환하게 웃었다. 황톳빛 길 한편에 하늘색 지붕이 환하게 얹어진 필로티 구조의 시멘트 이층집이었는데 주변의 나무집에 비해 튼튼해 보였다. 판은 설거지하던 동작을 하며 “오카네(돈)”라고 하다가 두 손을 세워 양손 손가락 끝을 모아 지붕 모양을 만들었다. 여린 몸에 비해 손 마디가 두툼하고 거친 손이 집의 지붕을 만들었다. 제임스는 가족은 중국에 있고 자기는 사업하러 돌아다닌다고 했다. 무슨 사업인지 중국어로 마구 설명했으나 알아듣진 못했다. 사업하는 사람이 영어를 이렇게 못하나 이상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one man이 더 있는데 airport no 라는 걸로 봐선 그 사람이 통역을 담당하는데 아마도 같이 못 탔나 싶었다. 제임스는 치앙마이에 자기 별장을 지었다면서 역시 핸드폰 사진을 꺼냈다 허허벌판에 큰 집 한 채가 덩그러니 서 있어서 웃음이 났다. 이 마을 주변에 하우스들은 있는 거냐고 내가 물었더니 자기도 모른단다. 사람을 시켜서 짓고 이제 확인하러 간단다. 가서 자기 가족들을 초대할 거라고 했다.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삼촌, 고모, 이모 그들의 자녀까지 온갖 친척들의 사진을 보여주며 한자로 올 래(來)자를 내 손에 아주 여러 번 그렸다. 제임스는 중국인이면서 이름이 왜 제임스인지도, 무슨 일로 돈을 버는지도 몰랐지만, 우리랑 대화하기 전까지 한자가 빼곡하게 적인 문고판 책을 열심히 읽던 점잖고 조용한 남자였다. 그런 남자가 가족사진을 보여줄 땐 알아듣지도 못 할 말을 시끄럽게 조잘거리며 아이같이 웃었다.
둘이 나와 내 핸드폰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래, 당신들도 깠으니 나도 까야지. 가족사진을 보여주는데 내 남편 사진을 보고 제임스가 “썬?”이냐고 물어서 나에게 등짝을 맞았다. 집 사진을 물어서 우린 아파트에 산다, 내가 사는 아파트 외관은 사진을 잘 안 찍는다고 했더니 집 사진이 없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친척들과 모여서 같이 살지 않는 것도 신기해했다.
어색했던 시간이 깔깔 호호 큭큭 웃음으로 채워지자 금세 비행기 착륙 시간이 되었다. 아…. 진작 이들과 얘기를 나누며 갈걸. 왜 다섯 시간을 서로 어색하게 앞만 보며 온 거지? 내리는 시간이 아쉬워졌다.
사람에 치이고 일에 치이고 가족에 치여서 혼자 떠나고 싶었는데 이들과 고작 한 시간의 수다 끝에 사람이, 가족이 보고 싶어지고 일을 해서 돈을 버는 일이 가족을 먹여 살리는 데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하게 되니 앞으로 다가올 시간도 또 잘 지낼 수 있으리라는 마음이 들었다. 비행기 표시등이 꺼지자 우리 셋은 일어서며 서로 포옹을 하고 잘 가라는 인사를 나눈다.
‘바이바이’ 하는 그들에게 ‘안녕’이라고 인사했다. 편안할 안, 편안할 녕, 당신의 평안을 만날 때도 헤어질 때도 똑같이 묻고 비는 아름다운 우리의 인사말. 당신의 오늘이, 내일이 평안하길 빕니다. 그렇게 당신의 안부를 기도하며 나의 후끈한 여름 여행은 시작되었다.
"우물쭈물 망설이던 나의 봄날의 비애도 어느덧 지나가고 말았구나! 유월에 날린 내 눈발의 심술궂음은 지나가고 말았구나! 나 온통 여름이 되었으며 여름의 한낮이 되었구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책세상, p.1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