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뽀나스 : 지상에서 먹는 기내식

by 운동화

얼마 후 여행이 끝나고 이스탄불에서 경유지인 암스테르담으로 다시 돌아와 한국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역시나 오늘도 기상 상황이 좋지 않다. (언제는 좋았나?) 탑승할 때부터 흩날리던 눈발이 더욱 거세지더니 이제는 아예 바께스로 눈덩이를 들이붓는 수준이다. 동그란 창에는 눈이 덕지덕지 달라붙더니 밖이 잘 보이지도 않게 되었다. 승객들은 탑승을 완료했으나 비행기는 시동조차 켜지 않았다. 얼마 후 기장이 눈이 그칠 때까지 기내에서 대기해야 한다는 방송을 했다. 하염없는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아... 내 인생은 왜 매번 이 모양이야.


나는 비상구에 안 앉은 것만도 감사하며 ‘곧 출발하겠지.’라는 생각으로 승무원이 웬일로 나눠준 땅콩을(우리나라 국적기 아니었음) 맛있게 와작와작 씹어 먹고 있었다. 짭조름하니 고소하고 맛이 있었다. 염치없는 영웅은 지나가는 승무원에게 “원 모어 피넛, 플리즈?”라고 데크레셴도(decresc. 음악용어: 점점 여리게)의 음정을 잘 살려 물었다. 한 번도 통한 적은 없지만, 예쁜 고양이 눈도 잊지 않았다. 승무원은 의외로 흔쾌히 “슈어!”를 외치며 땅콩 봉지를 가져다주었다. 영웅의 행동을 본 승객들은 너도나도 용기를 얻어 ‘원모어’를 외쳤다. 승무원들이 아예 모든 승객에게 땅콩 봉지를 새로 나눠주기 시작했다. 영웅은 이때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려야 했다. 고양이 눈이 통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을 이상하게 생각해야 했다. 땅콩 가루가 아밀라아제에 젖어 드는 미감에 취해 사건의 복선이 깔리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시동도 켜지 않은 비행기에 앉아 다섯 시간을 더 기다렸다. 아기들은 울기 시작하고 어른들은 항의했다. 이렇게 기다릴 거면 차라리 내려달라고 짜증과 고성이 오갔다. 항공사로서도 난감했을 것이다. 제설이 언제 끝날지 모르니 처음엔 탑승시키고 기다렸는데 관제탑에서는 기다리라는 말뿐이고 시간이 이렇게 오래 지체될 줄 몰랐을 것이다. 문제는 이미 탑승한 승객들이 내리려면 비행기 안의 모든 짐을 빼야 한다는 원칙이었다.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르는 항공기 테러에 대비하여 항공법은 탑승객이 내리는 경우 화물칸의 모든 짐도 다 내려 다시 검색대를 통과시켰다가 다시 실어야 한다. 승객들도 물론 마찬가지다. 그렇게 승객과 짐을 내리고 검색을 다시 해서 태우다 보면 결국 출발 시간이 더 지연될 수도 있기에 비행기에선 웬만하면 승객을 다시 내리는 일을 하지 않는다.


항의로 소란스러운 비행기 안이 어느 순간 조용해졌다. 라면 배식이 시작된 것이다. 푸드 트레이가 오가면서 각종 컵라면의 패션쇼가 시작되었고 허기진 사람들은 눈알을 굴리며 과연 어떤 라면이 가장 맛있어서 후회 없는 선택을 안겨줄 것인지 고심하며 트레이를 훑었다. 어느새 비행기 안은 MSG의 향연이 아니라 향으로 가득 찼다. 후루룩후루룩. 짭짭. 경쾌한 리듬으로 면발의 연주가 시작되고 이어 눈치 빠른 승무원들이 건네는 각종 음료가 목구멍으로 꿀떡꿀떡 넘어가는 소리가 타악기처럼 리듬에 박자를 더해 주었다.


탑승한 지 네 시간 뒤에는 첫 번째 식사가 배식 되었다. 과연 비행기를 타고 지상에서 기내식을 먹어본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난 있다. 음홧화화…. 기내식에도 보존 시간 규정이 있다. 콜드밀은 만들어진 지 24시간 이내, 핫밀은 48시간 이내 취식하는 것이 기내 식중독 예방을 위해 좋으므로 먼저 나가야 할 식사가 미리 배식 된 모양이다. 그렇게 사람들이 기내식을 다 먹고 혀의 압력으로 이 사이를 쩍쩍 훑으며 오늘의 연주를 마무리하는 동안 드디어 피날레를 장식할 마지막 합창처럼 비행기의 엔진이 우웅~ 하면서 가동되기 시작했다. 드디어 출발이다. 이후에 이어진 한 번의 식사와 마지막 기내식 대신 주어진 맛있는 각종 빵과 음료의 대환장 파티로 화장실은 내내 북새통을 이루었다. 알다시피 화장실은 비상구 바로 앞에 있다. 당신은 아직도 비상구 자리에 앉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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