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진아웃를 당한 타자의 선택과 비슷해
정말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추석 연휴 다음날 나는 조금 빨리 출근을 했다. 7월부터 10번째 직장에 출근을 했고, 이번 추석 연휴는 3개월간 근무기간 중에 가장 긴 휴식이었다. 나름은 잘 쉬고 활기차게 일찍 출근을 한 사무실에는 나 밖에 없었다. 노트북을 켜고 우리집에 없는 나름 괜찮은 커피머신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을 뽑아서 자리에 앉았다. 그때 팀장에게 카톡이 왔다. 출근을 했으면 주간 회의 전에 팀 주간 업무 문서를 좀 정리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온라인으로 공유되어 있는 팀 주간 업무 문서를 살펴보고 편집했다. 보고를 위한 보고를 편집하는데 한 5분쯤 걸렸고, 나는 팀 주간 업무 문서 '프린트' 버튼을 누른 뒤에 탕비실 쪽에 있는 복합기로 갔다. 총 3장의 문서가 있었다. 2장은 내가 같은 문서를 2장 출력한 것이고, 맨 아래는 '조직 설계 및 인력 운영(조정안)'이라는 문서가 있었다. 내가 본 적이 있는 파워포인트 템플릿이 보이니까 내가 해당한 팀에 대한 내용으로 추측할 수 있었다. 신기하게도 문서는 1초만에 내 눈에 스캔되었고, 문서에서 내가 가장 관심있어 하는 사람의 이름을 찾았다(물론 그 사람은 바로 나였다). 그리고 그 이름 아래에는 '권고사직 유도'라는 띄어쓰기를 포함하면 7글자가 똑똑히 박혀있었다. 7글자의 충격을 줄여보려고 노력했지만 7글자의 충격은 다시 4글자로 압축되어 머리를 뒤흔들었다. '권고사직'
'권고사직'이 아니고 '정리해고'였다면 조금 더 나았을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하여 한 회사에서 약 30년을 일하셨던 아버지는 내가 대학교에 입학하던 1998년 IMF 라는 큰 파도를 피하지 못하셨다. 아버지는 적지 않은 퇴직금을 받으시고 정리해고에 응하셨다.
OEM 의류업체에 다니던 누나는 영화 '인디에어(In the air)'에 나오는 장면 아니 상황을 목격했다. 미국 본사에서 날아온 해고 전문가는 조지 클루니를 닮지는 않았지만 직원들과 1대 1 면담을 하면서 해당자들이 울던 말던 품위있게 정리해고와 이를 수용할 때 혜택을 안내해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내 이름 아래 4글자는 '정리해고'가 아니라 '권고사직'이었다.
외국계 브랜드 회사에 다닐 때 나도 팀원에게 '권고사직'을 제안하고 설득한 적이 있다. 나는 그 팀원이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나 지사장의 결정과 지시는 회사원인 내게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지겹게 그 팀원에서 권 고 사 직 이라는 4글자를 끊임없이 속삭였다. 대답을 듣지 못하는 속삭임을 반복하면서 나도 지쳐갈 때쯤 그 팀원은 '권고사직'을 수용했다. 예상치 못한 결과에 내가 놀라기도 전에 그 팀원은 순식간에 회사를 떠났다.
사실 '권고사직'에 대한 선택은 딱 두 가지뿐이다. '예스' 와 '노'. '예스'일 경우에는 회사와 위로금에 대해서 협의를 하면 된다. '노'일 경우에는 본인이 사무실 의자에 바늘방석을 깔고 앉는 것이 된다. 관련 법률과 사규 등에 대한 전문적인 영역을 다루는 일로 노무사가 등장하게 되고, 사측과 고용자는 자신의 입장에 유리한 자료를 수집하는 일에 열을 올릴 수 밖에는 없다.
‘권고사직'이라는 글자를 접한 것 자체는 충격적인 일이지만, 다시 생각해보아도 나는 방송인 노홍철 씨의 표현처럼 '럭키가이'에 가깝다. 회사에서 권고사직을 제시할 때는 나의 업무능력에 대한 부족함을 적어도 3번은 문서상으로 명확하게 지적하는 쓰리아웃작전을 전개할 수 밖에 없다. 권고사직에 대한 쓰리아웃작전은 매우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작전인데, 나에게 이 작전을 실행하기 전에 작전 관련 문서가 노출되었다. 그래서 회사에서는 어떻게 생각할 지 모르겠지만, 럭키가이인 나는 협상의 주도권을 가질 수가 있었다.
물론 협상의 주도권을 가져서 행복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어처구니 없는 뒤통수 치기를 당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무척이나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쓰리아웃작전이 실행될 때, 타석에 있는 고용자는 이 작전을 모르기 쉽고 스트라이크 하나가 누적될 때 마다 슬럼프에 빠진 4번 타자처럼 고통을 겪게 된다. 비디오 판독을 요청할 수 있겠지만 공을 던지는 투수와 미트질을 하는 포수, 그리고 결정적으로 스트라이크를 판정하는 심판은 모두 한 편이다.
다시 보아도 '권고사직'에 대한 선택은 딱 두 가지뿐이다. 삼진 아웃을 당한 타자가 쓸쓸하게 덕아웃을 향하는 것과 분노를 표출하며 비디오 판독을 요청하는 것이다(물론 분노를 표출하지 않으면서 비디오 판독을 요청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이제까지 국내외 야구경기를 보면 이런 경우는 못봤다).
나는 어제 삼진아웃을 당하고 쓸쓸하게 덕아웃으로 향했다. 나는 비디오 판독을 요청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비디오 판독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는 문서를 미리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타석에 서있는 수많은 회사원들께는 한 마디는 하고 싶다. 삼진아웃을 외치는 심판을 너무 믿지는 마시라. 심판은 사람이고 오심은 많다. 세상은 넓고 야구팀은 많다. 팀을 옮겨서 혹은 리그를 옮겨서 다른 타석에서 당신의 실력을 보여줘라. 그래도 안되면? 야구말고 다른 운동을 하면 된다! 모든 사람이 야구를 할 필요도, 잘 할 필요도 없다.
나는 이제 '그들만의 리그'를 지켜볼 것이다. 나는 달리기를 좋아하니까 목숨 걸지 않고 가끔 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에게 삼진아웃을 외친 심판과 투수에게 한 마디 하고 싶다. 나영석 PD의 책 제목을 아는가? '어차피 레이스는 길다'
P.S. 동네 생활맥주에서 정신없이 이렇게 적고 보니 내 이야기가 소설 같기도 해서 슬프다. 스피커에서 마이클 부블레(Michael Buble)의 Feeling Good이 들린다.
"It's a new dawn, It's a new day, It's a new life"
힘내자, 원이 아부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