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own long and widing road
잡지사 한국판 ‘러너스월드’에서 일을 했을 때, 이랬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한 것 중에 한 가지는 ‘뉴욕마라톤’에 출전 혹은 참관을 하는 것이었다(현재 뉴욕마라톤의 정식 명칭은 TCS New York City Marathon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편의상 ‘뉴욕마라톤’이라고 하겠다). 물론 그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에는 코로나19 라는 사상초유의 적이 등장하면서 뉴욕을 포함한 해외 마라톤에 대한 꿈을 접었다. 10번째 회사에서 주요 사업이 달리기 앱을 론칭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업무상 참고하기 위해서 수많은 버츄얼(virtual) 마라톤에 참가했다. 내가 ‘버츄얼’이라는 단어를 외우게 된 것은 대학교 때 좋아했던 ‘자미로콰이’의 노래인 ‘Virtual Insanity’ 때문이었다. 노래 제목은 물론이고 가사에도 워낙 여러 번 나오는 단어라서 자연스럽게 외웠다. 버츄얼 레이스 혹은 마라톤은 VR(Virtual Reality)과는 별 상관이 없다. 버츄얼 레이스가 유행을 하게 된 것은 코로나19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한날한시에 모여서 달릴 수 없게 되었고, 그래서 채식주의자가 되고 싶은 고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처럼 오프라인 레이스의 대안으로 버츄얼 레이스를 찾게 되었다. 아무리 여러가지 의미를 부여한다고 해도, 버츄얼 레이스는 레이스 참가자들의 열기와 파스 냄새가 진동하는 진짜 오프라인 레이스와 같거나 더 의미가 있을 수는 없다. 예전에 아버지가 라디오에서 ‘사이버 대학교’ 광고를 듣고, ‘사이비 대학교’라고 하신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경영학과에 편입한 때라서 잠깐 발끈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설명을 듣고 나니 사이비 같기도 했다. ‘수업도 다 온라인으로 듣고, 하면 그게 진짜 학교 다닌 거랑 같을 수가 있나? 사이비지’라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그래도 내가 이력서에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경영학과 졸업도 꼭 적었던 것을 생각하면 사이비 아니 사이버 대학교도 이력서에 적을 수 있는 한 줄 요건은 충분했다.
10월말에 10번째 회사를 그만두고, 그 회사와 관련된 일들은 노트북 바탕화면에 있는 파일들처럼 되어버렸다. 뉴욕마라톤 버츄얼 레이스 접수도 그렇게 잊어버린 일이었다. 그러다가 지난 주에 인스타그램에서 지인이라기 하기에는 막강한 러닝 인플루언서가 뉴욕마라톤에 출전한다고 올린 것을 보고 버츄얼 레이스 접수가 생각났다. 버츄얼이라 하더라도 레이스가 아니라면 나같은 일반인이 풀코스 마라톤 거리를 달릴 일은 거의 없다. 거창할 것은 없지만 준비에 착수했다. 달리기 훈련은 하지 않기로 했다. 10월 중순에 달렸던 서울 100k 대회 50k 완주 이후로 푹 쉬고 있었다. 달리기는 하지 않고 점심과 저녁 시간에 열심히 배민커넥트 자전거 배달을 하고 있었다. 아침에 달리기를 해야지 생각을 했지만 몸이 무거워서 하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내가 아는 지식의 한도 내에서 다음 주에 풀코스 마라톤을 달릴 예정이라면 달리기 거리를 확 줄이고 쉬어야 하는 테이퍼링(tapering) 기간이었다. 당당하게 한 번도 달리지 않고 쭉 쉬었다. 크로스 트레이닝인 배민커넥트를 하루에 4~5시간은 하고 있으니 이것만 믿기로 했다. 2021년 11월 3일(수) 아침 6시반 정도부터 달리기로 결정하고 한 가지 지킨 것은 월요일과 화요일에 술을 마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만 화요일 저녁에 배민커넥트를 마치고 짜장라면 두 개를 끓여먹어서 달릴 때 필요한 에너지원이 되는 탄수화물을 비축하려고 했으나 하지 못했다. 저녁 배달을 마치고 나니 피곤했고, 새벽 5시에 알람을 맞춰두고 바로 잤다.
아침 5시에 일어나서 화장실에 두 번 가고, 에너지젤 2개를 먹었다. 그리고 주섬주섬 달릴 때 입을 옷과 러닝화를 준비했다. 하의는 짧은 레이스용 5인치 길이 쇼트(short)을 상의는 아침이면 쌀쌀할 것 같아서 긴 팔 러닝용 티셔츠를 챙겼다. 버츄얼 레이스의 기록 측정은 챔피언칩으로 대표되는 기록칩이 아니라 내 스마트폰으로 해야 한다. 늘 사용하던 트레일 러닝용 벨트에 에너지젤 1개도 넣었다. 양말은 긴 나이키 컴프레션 삭스를 신었다. 러닝화는 고민을 하던 차에 부엌에 있는 ‘Time to run NYC’라는 프린트가 된 호카(HOKA) 머그컵이 보여서 호카 카본X2를 신었다. 집 앞 횡단보도를 지나서 뉴욕마라톤 앱과 가민945 GPS 시계로 기록 측정을 시작했다. 생각보다 날씨는 딱 달리기가 좋았다. 마스크를 했기 때문에 코로만 호흡을 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하고 초반 페이스(pace)를 1km에 5분에 달리는 것으로 하려고 노력했다. 한 10km를 달릴 때까지는 즐거웠다. 계획한 5분 페이스로 거의 정확하게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15km 지점에서 멈추고 말았다. 이건 성가신 정도가 아니고 오른쪽 발바닥 중간 쯤에 물집이 생긴 것이 확실했다. 다만 이 물집은 아직 터뜨릴 단계가 아니고, 점점 커지면서 나를 괴롭힐 것이 확실했다. 풀코스 마라톤을 달리면서 러닝화에 돌이 들어간 적은 있었지만, 물집 때문에 멈추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보통 풀코스 마라톤의 고통은 30km 정도부터 시작되어야 하는데, 고통의 시간이 너무 빨리 시작되었다. 뉴욕마라톤 앱에서는 5마일(mile)마다 음성 코칭도 나오고, 참가자들의 즐거운 인터뷰도 있었지만 이런 목소리들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내가 계획한 풀코스는 집에서 강남 쪽 한강공원으로 쭉 달리고 원효대교를 건너서 강북 쪽 한강공원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생각했던 대로 원효대교를 건너서 계속 달렸다. 이촌 지구 쯤에서 여자 달림이 한 명이 너무너무 즐겁게 내 앞에서 달리고 있었다. 조금 달리다가 시계를 보고 너무 만족스러운지 기쁨에 제자리에서 펄쩍 점프를 하기도 하고, 카메라로 촬영하면 게티이미지에 판매도 가능할 것 같은 뒷모습이었다. 오른쪽 발바닥의 물집 하나 때문에 이렇게 고통스럽다니, 평소에 신던 양말과 러닝화를 신지 않은 내가 미웠다. 여자 달림이가 내 눈에서 멀어질 때쯤에 한강공원 편의점이 눈에 들어왔다. 몸이 무거우니 머리와 몸의 싸움에서 머리가 졌다. 배가 고픈 것인지 나를 위로하려는 것인지 쵸코바 하나, 에너지 음료 한 캔 그리고 얼마 전 아들이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사달라고 졸랐던 멘토스 하나까지 샀다. 다행이 런벨트에 체크카드가 있어서 3,700원을 계산하고 우걱우걱 에너지 음료와 쵸코바를 먹었다. 배가 부르다기 보다는 진정이 되는 느낌이었다. 더불어 3,700원 어치를 달리라는 마음의 소리도 있었다. 그렇게 아무런 준비도 않하고도 내심 목표는 3시간 30분안에 완주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버츄얼 레이스의 장점인 내 맘대로 코스도 아주 평탄하게 확정했다. 하지만, 물집을 보아도 기록을 확인해보아도 이제 이 목표는 이미 달성 불과했고 새로운 목표는 완주도 아니었다. 무조건 1km씩 달려서 집에 가는 것이었다. 꾸역꾸역 30km까지 달려왔을 때 이제 조그마한 돌덩이 크기로 느껴지는 오른쪽 발바닥의 물집을 손가락으로 꼬집어서 터뜨렸다. 그리고 마침 옆에 쓰레기통이 있어서 물집의 원인이 된 양말은 벗어서 버렸다.
잠실철교를 건너겠다고 머리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몸이 잠실대교로 가서 절뚝거리면서 되돌아왔다. 잠실철교를 지하철과 나란히 멋있게 달리고 싶었는데, 현실은 달리는 것인지 걷는 것인지 모르게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었다. 제발 40km까지만 가면, 나머지는 어떻게 뛰겠지라고 생각하면서 잠실철교를 건넜다. 오른쪽에 멀리 보이는 잠실주경기장을 보면서 예전의 풀코스 마라톤 추억을 생각하지도 못했다. 집에 가야했기 때문에 잠실철교를 건넌 뒤에는 계단을 내려가야했다. 꾀가 늘어난 몸은 계단이 보이자마자 멈춰서버렸다. 잠실나루역으로 내려가서 다시 달리려고 했을 때, 귀에 끼고 있는 무선 이어폰에서 ‘Congraturaton!’이라는 외침이 들렸다. 가민 시계는 아직 결승점까지 2km가 남았는데, 뉴욕마라톤 앱에서는 달린 거리가 도너츠 모양으로 완성되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얼떨떨한 완주였다. 이런 완주도 처음이었다. 보통은 풀코스 마라톤 마지막 400m는 잠실주경기장으로 들어가서 죽을 힘을 다해서 달리고, 특히 결승점에서는 사진 촬영도 있기 때문에 어떻게든 정신을 차려서 스퍼트를 하는데,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피니시였다.
온라인으로 완주 기록증을 다운받고, 뉴욕마라톤 앱에는 완주 메달을 걸고 셀카를 촬영할 수 있는 신박한 기능이 있어서 정말 오랫 만에 셀카를 찍었다.
배민커넥트 배달을 할 때 자주 지나다니는 고층 아파트 단지에는 빨갛게 단풍이 물들어있었다. 왜 배달을 하면서는 이 단풍을 한 번도 보지 못했을까 생각을 하면서 집을 향해서 걸었다. 완주를 하고 나서 드는 생각이 겨우 단풍이라니…풀코스 마라톤도 달리기인데, 역시 모든 달리기는 준비한 만큼 기쁨을 누릴 수 있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 역시 넌 제대로 달리려면 아직 멀었다.
세상이 불확실할 때는 내가 해야 할 일이 명확해야 한다. 100일 동안 매일 5시 반에 10km 달리기. 그 단순한 일에 나는 삶의 의미를 부여했다. 매일 달성하고 기록함으로써 하루하루 성공 경험을 쌓아 갔다. 삶은 과정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과정은 결과를 만났을 때만 유의미하다. 성공이든 실패든 해 봐야 다음을 준비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 이왕 시작한 거 딱, 100일만 달려볼께요(이선우 저) P 277 -
P.S. 다소 시끄러워야 하는 카페는 조용히 토론을 하고 있는 외국인 두 명과 바로 옆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는 공사장 차량 덕분에 집중해서 글을 쓰기가 좋았다. 앞으로 공사장 주변에서 글을 써야 하는 생각이 들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