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장의 매니지먼트 역량_들어가기(序)

팀장이 살아야 조직이 산다!

by 양병채

“팀장의 역할 중 가장 중요하고 우선적으로 해야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면담이나 코칭, 사내 강의 중 많은 팀장에게서 받는 질문 중 하나다.

이런 질문을 받으면 나는 다시 질문한다.

“매니지먼트 역량이 부족한 팀장과 리더십 역량이 부족한 팀장 중 어느 쪽이 더 위험할 것 같은가요? “

그런 후 내 생각을 물으면 즉답을 대신하여 필자가 16년 전 캔 블랜차드 사의 수석 부사장으로부터 직접 일주일 간 Situational Leadership 강사 양성 교육을 받을 때 그가 전해줬던 간단하고 명쾌한 말로 내 대답을 대신한다.

“리더십 없는 매니지먼트는 평범함을 만들고, 매니지먼트 없는 리더십은 재앙을 만든다.”


본격적인 팀장의 매니지먼트 역량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내기 전에 많은 사람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미국의 흑역사 중 하나를 소개한다. 이 이야기는 미국에서 역대 가장 젊었고 대중의 인기와 지지도 높았고 강력한 리더십을 보여줬던 대통령인 존 F. 케네디 재임 시절에 있었던 일로 전쟁에 대한 매니지먼트 역량 부족으로 미국 전쟁사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는 데에서 힌트를 얻어 팀장의 매니지먼트 역량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실마리로 삼고자 한다.


때는 공산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맹위를 떨치고 미국을 필두로 서방진영과 러시아를 필두로 한 공산진영이 철저하게 대립하던 1961년의 이야기다. 1959년 미국 본토 턱 밑에 있는 쿠바는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 등 열성 공산혁명가들 주도로 결국 공산화된다. 카스트로는 공산혁명에 성공하자 자국 내에 있는 자본주의의 상징인 미국을 비롯한 외국자본을 몰수하는 한편 1961년 1월에는 미국과 외교를 단절하는 초강경 조치를 취한다. 미국의 입장에선 러시아를 필두로 한 공산권과 전면전을 선포한 마당인지라 쿠바의 행동이 거슬릴 수밖에 없었다. 만일 쿠바가 같은 공산국가의 대부격인 소련에서 핵미사일이나 신형 무기를 수입해 와서 발사할 경우 미국의 주요 도시가 불바다가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미국은 어떤 방식으로든 공산국가 쿠바가 미국에 위협이 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해야 했지만 그렇다고 직접 공격할 명분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한편 미국 정부는 1960년부터 이 침공을 계획하고 자금을 제공했다. 존 F. 케네디대통령직에 오른 지 석 달도 안된, 1961년 4월에 작전이 개시됐다. 존 F. 케네디는 쿠바의 사회주의 정책이 자신들의 영향력을 줄어들게 할 것으로 보아 CIA의 도움을 받는 쿠바 망명자들이 쿠바를 공격하도록 지원했고, 교수이자 쿠바 혁명 이후 최초의 총리를 맡은 호세 미로 카르도나(JoséMiró Cardona)가 임시 수장을 맡으면서 쿠바에서 다당제 민주주의가 회복되도록 지원했다. 궁리 끝에 미국은 고육지책으로 ‘피그스만 침공 작전'을 계획한다. 작전을 주도한 CIA는 쿠바인 망명자를 이용해 반 카스트로 세력의 봉기를 유도할 계획을 세운다. 비밀리에 마이애미에 쿠바인 망명자들을 모아 '2506 여단'을 조직하고 훈련에 들어갔다. 하지만 애초에 1,500명에 달하는 지원자를 모집하면서 비밀이 철저하게 유지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미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는 미국이 어떤 방식으로든 자국을 공격하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사실 쿠바 남쪽 바다에 위치한 피그스만은 미국이 상륙작전을 펼치기엔 적합하지 않은 지역이다. 하지만 침공의 배후로 지목되는 것은 절대적으로 피하고 싶었던 미국은 이 지역을 상륙지점으로 결정한다. 1961년 4월 15일 8대의 B 26 폭격기가 날아올라 쿠바에 기습적인 폭격을 단행했다. 폭격은 성공적이었지만 폭격을 마친 폭격기 중 2대가 플로리다로 날아가는 실수를 저지른다. 이로써 쿠바 망명 세력의 도발로 꾸며 책임을 회피하려던 미국의 계획에 차질이 생기게 된 것이다. 미국이 작전을 주도한 사실이 밝혀지는 것을 우려한 케네디 대통령은 2차 폭격을 포기하고, 4월 17일 병력 1,500 명을 피그만에 상륙시킨다. 하지만 상륙을 너무 늦게 한 탓에 쿠바 군은 만반의 준비를 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상륙지점으로 쿠바 군의 지상병력이 대대적으로 몰려들면서 2506 여단은 위기에 봉착했다.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미국은 다시 폭격기를 출격했지만 쿠바 군은 두 번 당하지 않았다. 결국 하늘과 땅 모두에서 쿠바 군이 승리했다.


피그스만 침공 작전은 미국의 선제공격이었음에도 완벽한 참패로 끝났다. 2506 여단 대원 가운데 118명이 죽고 1,189명이 쿠바 군에게 포로로 사로잡혔다. 미국은 쿠바의 굴욕적인 제안을 받아들여 5,300만 달러 규모의 의약품과 식량을 제공한 후에야 비로소 자국의 포로들을 데려올 수 있었다. 결국 CIA 국장 앨런 덜레스(Allen Dulles)를 비롯한 여러 핵심 간부가 작전 실패에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에 반해 피그스만 침공 저지를 계기로 피델 카스트로는 자신의 권력기반을 확실히 다잡게 되고 무려 50여 년 동안 쿠바를 철권통치했다.


복기해 보면 피그만 침공 작전은 의사결정을 한 순간부터 실패를 예견할 수 있었는데 '집단사고'를 유발하는 조직구조에서 중요한 의사결정을 했기 때문이다. '집단사고'란 의사결정에 참여한 사람들 간에 친밀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논쟁을 통해 좋은 결정을 도출하기보다는 쉽게 한 방향으로 의견을 모아버리는 현상을 말한다. 당시 침공 의사결정에 참여한 케네디 대통령, 딘 러스크 국무장관,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 맥조지 번디 안보보좌관, 앨런 덜레스 CIA 국장 등은 모두 친구 사이였다. 이들은 성장배경도 비슷했고 출신학교도 대부분이 하버드대였기에 그들은 금세 쿠바 침공으로 의견을 모았고, 국가 간에 전쟁에 준하는 군사작전을 시행함에 있어 실패할 가능성은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당연히 디테일한 계획이나 작전 중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상황에 대한 사전 준비와 계획이 안되어 있었다. 주위의 시선을 너무나도 의식한 미국의 안일한 태도도 작전 실패의 한 가지 원인으로 볼 수 있는데, 미국은 이 침공 작전의 배후로 미국 정부가 지목되는 것을 의식한 나머지 최악의 상륙지점을 정하고, 2차 폭격을 지연하는 등의 실수를 저질렀다.

일단 피그스만에 쿠바 망명 세력이 상륙하기만 하면 쿠바 내에서 반(反) 카스트로 세력이 들고일어날 것이라는 미국의 희망적인 예상도 보기 좋게 빗나갔다. 카스트로는 전(前) 정권인 바티스타 정권보다 폭넓은 민심의 지지를 받고 있었고, 이미 쿠바 내 반(反) 공산 세력은 숙청된 상태였다.


결론적으로 피그스만 침공 작전은 계획부터 실행까지 완벽하게 실패한 군사작전이다. 미국이 유일하게 성공한 것이 있다면 쿠바와의 협상을 통해 대가를 지불하고 포로를 구출했다는 사실뿐 이다. 이 사건으로 미국은 쿠바에서의 주권침해행위에 대해 국제적인 비판을 받게 되었고, 쿠바와 미국 간의 관계는 급속히 냉각됐었다. 이 사건은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를 맞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미국의 피그스만 침공작전은 어떤 일을 계획하고 실행함에 있어 매니지먼트 역량이 얼마나 중요한지 일깨워주는 소중한 교훈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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