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999년, 813-2번 버스

가족으로, 만족 못했던 소년

by 봄아범


참 잘했어요. 여름방학 일기장에 찍힌 도장을 바라본다. 하루라도 빼먹으면 어머니에게 매를 맞으면서 쓴 일기였다. 내가 정말 잘한 건지 궁금했다. 내 뜻보다, 어머니의 뜻대로 살아간 날들이었다. 모범생으로 칭찬받으면서 마음 한편은 답답했다. 열두 번의 방학 일기장이 쌓이고, 중학교에 입학하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나보다 가족의 변화가 더 컸다. 집안의 가재도구 전체에 차압 딱지가 붙었다. 경매에 넘겨지지 않은 물건을 싸매고 반지하로 들어갔다. 아버지는 빚을 갚기 위해 늦게 들어오기 일쑤였다. 어머니는 종교활동으로 신에게 매달렸다. 실패한 아버지가 미웠다. 여전한 어머니의 잔소리가 듣기 싫었다. 귀에 꽂은 이어폰의 볼륨을 높였다. 음량보다 분노와 서운함이 더 커졌다. 마음이 넘쳐서 입 밖으로 욕이 나왔다.




1999년 여름. 비가 많이 오는 날이었다. 친구 B를 불렀다. 집 근처의 독서실에서 우산 없이 만났다. B는 흠뻑 젖은 나에게 우산을 씌워줬다. 빗소리에 묻힐 거라고 생각했을까. 학원비를 내지 못하는 상황. 어중간한 점수라면 공고를 가라고 말하는 어머니. 돈을 주지 못하는 부모. 배설하듯 푸념을 했다. B가 뭐라도 말해주길 바랐다. 그는 그저 듣기만 했다. 상욕을 연거푸 뱉다 보니까, 발은 학원으로 향하는 버스 정류장에 닿았다. 813-2번. 이 버스를 타면 학원에 간다. B가 오천 원을 쥐어 주었다. 버스비를 내고, 차창을 바라보며 눈물을 토해냈다. 원하지 않게 살아온 지난 시간이 서러웠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이 야속했다. 흐느낌이 잦아들고 나서야 손에 쥔 돈이 보인다. 천 원짜리 몇 장과 동전들. B가 건네준 우산.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마음을 둘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다는 것. 그것이면 족하다. 다시, 눈물이 흐른다. B로 인해 국, 영, 수보다 더 중요한 것을 배웠다. 들어주는 귀. 상대방에게 필요한 걸 살피는 눈. 대가 없이 나눠주는 마음.


그리고 대학입학을 앞둔 겨울. B, L, S와 함께 고등학교를 찾았다. 손이 빨개질 정도로 눈싸움을 하고 S가 찍은 우리.


2019년 겨울. 유난히 추운 날이었다. 친구 B를 찾았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준비하는 12월 31일. B의 생일이다. 그는 미리 주고받는 새해 인사로 생일 축하는 뒷전이라며 볼멘소리를 해왔다. 그래서 그의 가족만큼, 어쩌면 더 마음이 갔다. 이번 생일에 그의 가족은 함께 하지 못했다. B는 결혼 준비에 실패했다. 반대한 부모를 향한 원망은 화로 커졌다. 눈을 녹일 정도로 활활 타오르는 그의 분노가 사그라들기를 바랐다. 케이크를 준비해서 그가 생활하는 연구실에서 촛불을 껐다. 대학원 근처의 산을 올랐다. 숨이 가빠졌다. 겨울임에도 땀이 났다. 묘하게 개운했다. 그의 기분도 조금은 나아졌길 바랐다. 아니, 그런 바람은 가지지 않기로 했다. 나의 뜻일 수 있기에. 말은 줄이고, 곁에 있는 시간을 늘렸다. 울고 있던 고등학생인 내 옆에 그가 베풀었듯이.


B와의 등산이 처음은 아니었다. 표지와 셀카의 장소는 덕유산. 1박 2일 종주를 하던 중에 능선에서.


2020년 봄. 유난히 찬란한 날이었다. 이제는 정장이 제법 몸에 익는다. 서른 번도 넘게 경험한 결혼식의 사회. 그럼에도, 예비 신랑을 보는 심장이 요동친다. 마치 나의 결혼처럼. 코로나19의 창궐 속에 하는 결혼식이기에 달라진 풍경이 생경하다. 그보다 더, 턱시도를 입은 그의 모습이 낯설다. 예행연습을 하는 굳은 표정이 어색하다. 눈이 마주쳤다. 멋쩍은 미소에 함께 웃음이 났다. 나지막이 되뇐다. 잘할 거야. 그리고, 잘 살 거야. 오늘처럼 좋은 날만 있지 않을 것임을 안다. 다만, 비가 오는 날도, 추운 날도 함께 할 친구가 있음을 기억한다. 그 친구를 소개할 수 있는 것이 기쁘다. 결혼식에서 제일 힘차게 외치는 한 마디. 오늘은 마음 깊이 감사함과 축하를 담아 전한다.


“신랑, 입장!”

keyword
이전 07화왜 이러고 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