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리어에서 ‘유지’는 정말 안전한 선택일까
아무 일정도 없는 날이었다.
회의가 없었다.
메일도 잠잠했다.
그래서 효율적으로 일을 할 수 있었다.
미뤄둔 것부터 처리했다.
시간이 빨리 흘렀다.
이런 날이면
지금 상태로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괜히 움직여서 흐트러질 이유가 없다는 생각도 든다.
요즘 나는
새로운 판을 벌이지 않는다.
이미 돌아가는 것들을 정리한다.
그 편이 편하다.
몸도 덜 쓰인다.
일이 문제없이 지나간다.
며칠 뒤
지인 가족과 식사를 했다.
아이들 목소리가 시끄러웠다.
함께 식사한 형님은
요즘 준비하는 게 있다고 했다.
현재가 아닌 미래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자세한 설명은 없었다.
대신 지금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만 말했다.
긴 대화는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그 말들이
내가 최근에 피하고 있던 장면 같았다.
요즘 나는
시키는 일을 정리하는 데 익숙해졌다.
새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형님은
앞을 보고 있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느라 앞을 보지 못했다.
속도가 다르다는 걸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팀장이라는 말은
나를 보호해 준다.
동시에 나를 가둔다.
요즘 나는
시키는 일을 정리하는 데 익숙해졌다.
새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그게 안전해 보였다.
괜히 튀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있었다.
대신 마음 한쪽이 조금씩 불편해졌다.
일이 싫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만족스럽지도 않았다.
이 상태가 제일 설명하기 어렵다.
엑셀을 켰다.
대출이자 항목에서 손이 멈췄다.
그 줄은 늘 같다.
몇 달은 버틴다.
조금 더도 가능하다.
그래서 뭔가 싶었다.
숫자가 버텨준다고
내가 버티는 건 아니었다.
이 정도면 괜찮다고
나 자신을 설득할 수는 있었다.
설득이 오래 갈수록 몸이 먼저 반응했다.
움직이지 않는다고
상태가 유지되지는 않는다.
대부분은 조용히 닳는다.
눈에 띄지 않게 줄어든다.
그래서 나중에야 알아차린다.
앞으로 가는 게
정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쪽에도 넘어지는 사람이 많다.
그렇다고
여기에 그대로 서 있는 것도
안전해 보이지는 않는다.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는 느낀다.
지금 이 자리는
내가 오래 머물 곳은 아닌 것 같다는 감각.
그 감각이 요즘은 자주 몰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