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푸른국화 Apr 15. 2020

저녁 7시, 나를 위해 요리하는 시간#13

어느때보다 맵짠이 필요하지만 어느때보다 순하게

퇴근해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데 어떤 여자가 쩌렁쩌렁하게 소리를 지르며 들어온다. 멀리서 보면 정신나간 여자처럼 주머니에 손 찔러 넣고 소리를 지르는데 핸즈프리로 남자친구랑 통화하는 중. 엘리베이터 타서도 소리를 질러서 걔네 남자친구 오늘 소주 마실 예정이고 요즘들어 소주 자주 마신다는거 나도 다 안다. 나중에 소주 사들고 집에 올거래. 위 아래로 훑어봐도 계속 소리 지르길래 훑어보는줄 모르나 했더니 나 내리는 뒷통수에 들으란듯이 말한다. 엘레베이터에서 어떤 여자가 째려봤다. 너 알고 있었구나. 가끔 어떤 사람들은 진상부리고 뒤에 숨으려고 남자친구나 남편이 필요한가 싶다.


생각해보면 어느 누구도 거슬리지 않는 것들에 나 혼자 예민한가 싶다. 그렇다. 사실 나는 남보다 예민한 편이고, 그건 나도 안다. 출근길에 마스크 안쓴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은 왜 마스크를 안쓰나 거슬리고, 공동주택 분리수거함에 버려져 있는 잔반 담긴 플라스틱 도시락통을 보면 어떤 몰상식한 사람이 한 짓인가 또 그렇게 화가 난다.


나도 이런 내가 피곤해서 둥글둥글하고 성격좋은 사람들을 동경했었다. 부족하고 실수는 많아도 대신 타인의 부족함과 실수에는 너그럽다는 점에선 나보다 훨씬 우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웬걸...그들은 결코 타인의 실수에 관대하지 못했다. 본인의 실수에만 너그러울뿐.

물론 모두가 그렇다는 건 아니다. 세상엔 분명 자신에게 엄격하고 타인에겐 관대한 성인같은 존재들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동경해왔던 실체는 자신에게 관대하고 타인에겐 엄격하고, 대신 사람들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기에 둥글둥글하다, 성격좋다는 평가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처음엔 배신감이 컸지만 배신은 그들이 한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들은 잘못이 없다. 오히려 사회생활에 적합하게 진화된 것일뿐.


그래서 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차피 나에겐 엄격하게 타인에겐 관대하게의 성인의 반열에 오를 수 없다면 나에게도 엄격하고 남에게도 엄격한 것, 그정도면 괜찮다. 바꾸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죽어도 안되는 걸.

그러면서도 자연스럽게 조금씩 진화는 진행하고 있다.

언젠가 선배가 말했던, 천성이 변하냐, 그런데 나이가 드니 변하더라, 변하는 게 좋은건지는 모르겠다는 말이 공감되는 순간이 왔다.


아무튼 당신 왜그러냐고 싸우지도 못하면서 혼자 열폭해 삭히는 이런 날엔 어떤 때보다도 맵짠이 필요하지만 어떤 때보다 순한 음식을 먹는 것으로. 초식동물처럼 순하게 성격 좀 가라앉혀 보자.



순한 국물의 만두전골.

마른 멸치로 육수만 만들어 놓으면 딱히 많은 노력은 필요치 않다. 간마늘, 배추, 파, 무, 양파, 버섯, 소고기,만두에 육수 부어 끓이면 끝.



국간장 한스푼을 넣어주고 간이 모자라면 나머지 간은 소금이나 새우젓으로 마무리하면 깔끔해진다.

청량고추, 양파, 간장, 식초 넣고 찍어먹을 소스를 만들어준다. 간장의 염도가 높은 편이면 육수를 섞어준다.



알배기 배추를 많이 넣었더니 국물맛이 달다.

청량고추도 고춧가루도 안넣었더니 국물이 순하고 부드럽다. 자극적인 맛에 길들여진 직딩에겐 좀 심심한 맛, 하지만 건강한 맛.

절대 그럴수 없지만 가끔은 이렇게 심심하고 무난한 사람이 되고 싶은 내 마음이 담긴 음식.

그러면서도 끝까지 고춧가루와 청량고추를 그리워하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볼품 없지만 고춧가루도 필요하다고.


♧ 심심한 맛이 싫다면 김치를 넣어보자. 훨씬 맛있긴 하다.


작가의 이전글 저녁 7시, 나를 위해 요리하는 시간#1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