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선빵 날리면 안 되는 이유
성가신 일을 기꺼이 잘 해 주고 싶게 만드는 이가 있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억지로 하게 만드는 이가 있다.
협업자를 존중하는 사람과
그저 부려 먹으려는 사람의 차이 아닐까?
(이기준, <그래픽 디자이너>)
회사에서 업무란 모름지기 문서로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문서화하는 이유는,
첫 째 업무 히스토리 관리를 위해 필요하고,
둘 째 업무누락을 방지하고 책임소재를 분명히 할 수 있으며,
셋 째 협업 시에 의사소통을 원할히 하고 업무의 일관성 확보가 용이합니다.
문서를 남기지 않으면 동종 업무를 하면서도 매번 새로 업무 프로세스를 고안해야하고,
그러다 보니 업무 과정에서 필요한 절차를 누락하거나 실수할 가능성이 큽니다.
의사결정이 구두로만 오가다 보니 책임소재는 불분명해지고,
문서 없이 다른 팀과 협업이라도 하려하면 서로 무슨 말을 하는 지 전혀 소통 안 되는 회의를 장시간 해야 합니다. 유사 업무임에도 할 때마다 업무처리는 달라지고 일관성을 확보하지 못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문서를 만드는데 투입되는 시간이 아깝다며 다자고짜 일단 얼굴 보고 회의 좀 하자고 합니다. 물론 문서를 형식적으로 보기 좋게 만드는 시간이 의미없다고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임원 보고 문서도 아니고 팀 간 협업하기 위한 문서는 서로 문서 형식을 문제 삼을게 아닌데도 그 문서조차 만드는 시간이 아깝다고 합니다.
그런데 보통 글을 못 쓰는 사람들은 말도 잘 못 합니다. 회사에서 글을 쓴다는 것이 아름다운 문학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회사에서 글이란 현안을 분석하고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식의 보고서가 대부분입니다. 내 업무를 타부서 또는 상급자에게 설명하는 글입니다. 그 글이 안 써지는 이유는 글의 문제가 아닙니다. 대부분 업무 파악이 안 되었기 때문에 글이 안 됩니다.
아니, 업무 파악이 안 되어 글이 안 되는데, 말이 될 리가 있습니까? 보통 글 솜씨가 없어서 말로 설명한다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아예 내가 말로 할테니 너는 그럴듯한 문서로 만들어 달라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법무팀을 대필(代筆) 업무하는 데인 줄 아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니면 전화해서 우리 소송할건데 질 것 같냐, 이길 것 같냐고 묻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신점 봐주는 데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루종일 대필과 신점으로 시간을 보내다 보면 이게 내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인가 자괴감이 듭니다. 이것도 퇴사 이유 중에 3% 정도는 지분을 차지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 회사에서 기대하는 역할이 제가 하고 싶은 일은 아니라는 것. 이 회사가 저한테 기대하는 것과 제가 하고 싶은 일의 괴리. 아주 가끔 제가 생각하는 법무팀 업무를 할 때는 며칠동안 야근을 해도 눈에 생기가 돌며 일 생각에 각성되어 잠을 설칠 때가 있습니다만. 아주 가끔 있는 제가 생각하는 법무팀 업무는 이 회사에서는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은 아니라서요.
그렇게 자괴감이 들때, 또 전화벨이 울립니다.
멍 때리다 전화를 받으면 두서없는 말에도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 보겠지만
답변서를 쓰다가 혹은 의견서를 쓰다가 전화를 받으면,
하고 있던 업무가 마치 스위치 끈 것처럼 머릿속에서 탁 끊어지며 새로운 문의 내용에 집중할 수 있는 뇌상태가 되질 않습니다. 엄청 큰 빵을 입 안에 씹고 있는데 누군가 닭가슴살 한 덩이 입에 넣어준 것처럼 빵도 닭가슴살도 맛은 둘째치고 목이 막혀 켁켁 거릴테지요. 전화기에서 들려오는 말이 당최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멀미하는 것처럼 속이 울렁입니다.
- 팀장님, 죄송하지만 제가 전화로 설명을 들어서는 이해를 잘 못할 것 같아요. 지금 하고 있던 업무도 있어서 그런데, 메일로 보내 주시면 제가 하던 업무 끝내놓고 천천히 검토하도록 하겠습니다.
전 나름 정중하게 말씀드린 건데, 이 말이 어떤 포인트로 기분이 나쁜지 모르겠습니다.
메일은 보낼건데 미리 전화까지 해서 설명하는 거 아니냐는데.
저는 마음 속으로,
그 설명을 하나도 이해를 못하겠다니까요. 그러니까 메일 보내주세요, 제발.
보낸 메일을 봐도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가끔 사람들은 정말로 일이 되도록 하고 싶은건가, 아니면 그저 나는 일을 했다 그 말이 하고 싶은건가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를 이해시켜 협조를 구하고 싶다면 최소한의 성의는 들일텐데.
비슷한 일이 수차례 반복되면 그 사람의 전화번호만 봐도 심장이 두근거립니다. 최소한의 성의도 없이 고칠거 있으면 니가 좀 고쳐란 식의 그 사람은 모릅니다. 내가 몇 번을 참았는지. 내가 얼마나 속으로 참으며 해 줬는지. 법륜 스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말이 세게 나가는 것은 참았다가 말을 하니까 세게 하는 것이라고. 그러니 참지 말고 그때그때 내 감정을 말하라고.
하지만 스님, 말을 한다고 알까요? 말을 해서 달라질거면 말을 하지요. 어떤 현자는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현명함이란 바보와 논쟁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로 하면 화를 참지 못할 것 같아서 메일을 보냈습니다. 글에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부분, 법리검토를 하고자 한다면 추가되어야 하는 부분, 원하는 답변을 받기 위해서 수정되어야 할 부분들을 알려주고, 업무 담당자가 아닌 제가 고치면 담당자의 질의의도와 달라질 수 있으니 수정된 문서가 담당자의 의도와 일치하는지 한번더 확인해달라는 요지로 메일을 보냈습니다. 전 정말 감정을 최대한 숨기려 메일을 보냈는데 왜 답변은 또 전화로 하실까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 분의 전화번호만 봐도 심장이 두근거리는데요.
제가 전화를 하면서 화를 낸 것은 아닙니다. 그냥 좀 성의없이 전화를 받았고 목소리에 짜증이 묻었습니다. 전화 상대방은 그것을 선빵이라 인식한 것 같고, 선빵을 좋은 기회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전 난생처음 무례하다는 말을 들었고, 제가 뭐라고 말을 할 새도 없이 전화 먼저끊기를 당했습니다. 무례의 정도나 빈도같은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선빵이라는 빌미를 제공하면 무참하게 뭉게집니다. 상대방은 먼저 공격했으니 본인의 모든 행동이 정당화된다고 생각합니다.
선빵을 날릴거면 제대로 날렸어야 하는건데. 겨우 이 정도로 먼저 공격했다는 빌미를 제공한 것이 되어 상대방이 집중포하, 무차별 타격할 명분을 준 것이 몹시 억울합니다. 그러니 죽자사자 덤빌 수 있는 성격이 아니라면 조금만 더 참으세요. 직장에선 선빵 날리면 무조건 지는 겁니다. 선빵 날리면 무조건 나쁜 사람이거든요. 참고 기다리세요. 상대방이 먼저 공격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