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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 D-60

태풍전야 9월의 시작

by 푸른국화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되는 것.
생각해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김영하, <여행의 이유>)



9월의 첫 날입니다.

날씨는 아니지만 계절이 바뀐 날, 가을의 시작을 핑계삼아 저도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봅니다.

9월엔 제 일상에도 바람이 불 듯 합니다. 어쩌면 태풍일지 모릅니다.


퇴사예정인 날이 겨우 60일 채 남지 않았으니 이제 회사에 통보도 해야 합니다. 이 큰 회사가 저 하나 없다해서 안 돌아갈리 없지만 인수인계할 시간은 필요하니까요. 법적으로는 30일 정도의 시간을 두고 통보하면 됩니다. 이 30일의 예고는 회사가 지키지 않았을 때는 패널티가 있지만 근로자에게는 직접적으로 강제하지는 않습니다.


근로자에게 통보시기를 강제하는 것은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하고 불합리하기도 합니다. 회사 입장에서야 불공평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근로자들이 자발적으로 퇴사하는 이유는 보통 "이직"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경력직이 이직하는 경우 새로운 직장은 최종 합격 통보로부터 출근일까지 그리 많은 시간을 주지 않습니다. 보통 1주일. 시간을 많이 줘 봤자 2주 넘는 데가 거의 없습니다. 이런 현실인데 근로자도 퇴사하기 30일 전에 회사에 통보하라 하는 것은 부당하고 과도한 부담입니다. 사실 회사야 대체 근로자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지만 근로자는 대체 직장을 쉽게 구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새직장을 구하고 현직장에서 퇴사하는 경우가 일반적입니다.


저는 새직장을 구하는 것은 아니라서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는 편입니다. 그렇다고 너무 일찍 통보하면 남은 직장생활이 고역일 것입니다. 곧 떠날 예정인 사람은 어떻게 해도 미운 법이니까요. 소속감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저는 잘 공감이 되지 않습니다만 많은 사람들이,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지방에서는 더욱, 너와 내가 한 식구냐 아니냐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은데 퇴사 자체에서 오는 섭섭함은 어떻게 달래야할지 벌써부터 걱정입니다. 웃으며 이별할 수는 없는걸까요? 이 회사에 몸 담고 있으나 없으나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만. 저는 사람한테 충성하니까요. 조직을 떠나도 좋았던 사람들은 남고, 조직에 남는다해도 싫은 사람은 싫은 건데 말입니다. 같은 조직으로 묶이는 게 뭐 그리 큰 의미인가 싶은데 떠난들 달라질 게 있나요.


일상이 평화로우니 퇴사통보가 더 걱정입니다. 아무 징조도 없이 무슨 계기가 있는 것도 아닌데 갑자기 퇴사라니 배신감이 더 크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회사는 눈치채지 못하게 야금야금 퇴사준비를 하는 게 누군가에게는 배신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같은 행동이라도 어떻게 평가받는지는 당위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감정은 당사자의 것입니다. 제가 뭐라 할 수는 없는 것이고 그저 감수하여야 할 일입니다.


9월의 가장 큰 일정은 회사에 퇴사통보입니다. 퇴사통보 후에는 본격적으로 자영업자의 삶을 준비하는 기간이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사를 결심한 이유, 퇴사 결심을 한 저의 복잡한 마음 등을 주로 글로 남겼습니다만 퇴사통보 후에는 개업준비 과정을 글로 담아 볼까 합니다.

그럼 저의 퇴사일기 1부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퇴사일기 2부는 퇴사통보 후에 돌아오지만 브런치에 다른 글은 꾸준히 남길 예정입니다.


이번 학기부터 박사과정을 시작하게 되어, 제가 공부하는 주제를 가지고 연재 브런치북을 만들어 보려 기획 하고 있습니다. 또 몇 년만에 다시 시작한 그림에 관련된 에세이를 써보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읽어 주시고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작가라는 꿈을 오래 꿈꾸었는데, 브런치 덕분에 작가님 호칭을 들을 때마다 부끄럽긴 하지만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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