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자신감은 통장잔고에서 나오는 법

퇴사 D-42

by 푸른국화

D-42. 오늘 드디어 실장님께 퇴사하겠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1차 퇴사통보는 반려되었습니다. 직속상사의 반려로 인사팀 문턱엔 가지도 못했습니다. 다시 생각해 보라고 하시니 일단 일보 후퇴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퇴사 자체를 다시 고민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일방적으로 통보한 것이라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다음 주에 다시 한번 진지하게 퇴사의지를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새 명함이 나왔습니다.

이제 진짜 퇴사가 실감 납니다. 진짜네 싶으니 현실적인 문제들이 다시 고민스러워 집니다.


무엇이 고민이냐 물으면 역시 가장 큰 문제는 "돈"입니다. 월급은 적든 많든 정기적으로 따박따박 들어옵니다. 제때 안 주면 사업주가 처벌받기 때문에 떼일 걱정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자영업의 세계는 당장 수입이 0일 수 있습니다. 수입이 0일 때 비용도 0이면 그나마 견딜만할지 모르지만 고정비용이 이제 월급처럼 따박따박 들어갑니다. 돈 없어서 직원 월급 안 줬다간 형사처벌 받아야 하는 그 사업주가 이제 접니다. 자기 사업을 하면 제대로 잠을 못 잔다던데 사업하기도 전에 잠을 설칩니다.


하지만 돈 걱정이 사실 유일한 걱정이자 고민입니다. 그래서 조금 아쉬운 것은 월급 따박따박 들어올 때 통장잔고 두둑하게 채워놓을 걸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확실한 준비이자 거의 유일한 준비는 바로 통장잔고입니다. 새로운 뭔가를 도전할 때 언제까지 버틸 수 있냐는 결국 통장잔고가 결정합니다. 물론 자신에 대한 강한 믿음과 신념, 긍정과 여유는 통장잔고를 이기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비범한 사람이 못 됩니다. 걱정 많고 항상 최악을 가정하며 대안의 대안까지 준비해 둬야 마음이 놓이는 저 같은 사람은 버틸 수 있는 한계가 딱 통장잔고까지일 것입니다. 12년 직장생활이니 잔고가 바닥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두둑하지는 않습니다. 한 푼 더 있고 덜 있고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는 못해도 내 마음은 천지차이입니다.


당장 얼마간은 일이 없으면 없는 대로 그 자유가 달콤하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 초조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간이 길어지면 나의 존재가치에 의심이 생기고 자존감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심한 경우 우울감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대박이 나고 인정받는 방법, 그런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어떤 일이든 시작할 때는 미숙하고 예상치 못한 일들이 생기며 시행착오를 겪습니다. 왜 이렇게 못하나, 나만 못하나 싶은 시간들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시간을 얼마만큼 버텨낼 수 있나는 결국 통장잔고에 달려 있습니다. 조금 더 일찍 조금 더 멀리 내다볼 수 있었다면 잔고를 넘치게 채워 놓는 건데 말입니다.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려 하니 사회초년생 시절이 떠오릅니다. 그 시절 미숙하고 못한다는 말을 듣는 게 겁이 나서 미리 포기하는 게 많았습니다. 잘 못한다는 말을 듣는 게 무서워서 잘하는 것만 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이제 와서 그게 참 많이 후회가 됩니다. 그거 하나 후회가 됩니다. 내가 특별히 부족한 게 아니라 누구나 겪는 과정이고, 그저 버티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물론 귓등으로도 안 들었겠지만요.


그러고보니 저 같은 유리멘탈에겐 이 나이에 새로운 도전이 훨씬 유리한 것 같기도 합니다. 오직 누구의 멘탈이 강한가로만 버텨야 했던 20대와 달리 이 나이엔 통장잔고만큼 버텨진다는 것. 그리고 오래 버티면 결국엔 잘하게 되어있다는 것을 이제는 믿어 의심치 않게 된 것. 그러니 유리멘탈로도 웬만큼 버텨낼 것 같습니다. 다만, 멘탈보다는 통장잔고가 키우기 훨씬 쉬웠을텐데, 더 열심히 키워놓을 걸, 그랬으면 마음이 조금더 가볍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듭니다.



에필로그 혹은 쿠키.....

아주 오래 전, 20대 어린 여배우들은 완벽한 미모와 그렇지 못한 연기력이 늘상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언제나 연기력 논란과 함께 얼굴 하나로 먹고 산다고 비난받던 그 여배우들은 어느 새 연기파 배우로 거듭나 누구도 연기력을 문제삼지 못합니다. 생각해보면 처음은 누구에게나 있고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경험없는 신인들에게 베테랑 실력을 기대하며 비난하는 게 지금 생각해보면 참 부당하고 가혹합니다. 그 시절 어린 신인들은 그 부당함과 가혹함을 멘탈 하나로 버텼습니다. 버티며 반복하니 자연스럽게 잘하게 된 것입니다. 오직 본인의 멘탈 하나로 버틴 신인들이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찬가지로 그저 멘탈 하나로 스스로의 부족함을 버텨내고 있는 청춘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그저 그렇게 느낄 뿐 여러분은 절대 약하거나 부족하지 않습니다. 부족하다는 말을 참아내고 버텨내기만 하면 됩니다. 시간이 쌓이면 누구나 숙련자가 됩니다. 잘 못한다는 말을 듣는 시간이 지나면 잘한다는 말을 듣게 되는 시간이 반드시 오게 됩니다. 그 시간을 멘탈 하나로만 버텨내는 여러분은 정말로 대단합니다. 그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못 버티고 도망간 자리에 우직하게 오래버텨낸 누군가를 아주 오랜시간 후에 만났을 때, 그의 모습과 내 모습을 비교하는 것. 그것은 미숙한 시절 미숙하다 소리를 듣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고통스럽습니다.
이상, 새로운 도전에 가장 든든한 버팀목은 무엇인가 보니 결국 통장잔고라는 것을 깨닫고, 아 진작 알았으면 돈 좀 더 모아놓을걸 하다가, 그러고보니 사회초년생들은 멘탈 하나로 기득세력과 경쟁하고 있네 대단한 걸 하다가, 그렇게 버티면 결국 어벤져스가 되는데 그땐 몰랐지 하는 회한을 쏟아내고는, 그러니까 나처럼 후회하지 말자라는 꼰대스러운 말을 사족으로 더하여 봅니다.


keyword
이전 16화퇴사 D-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