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D-40
퇴사하겠다는 선언을 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대다수는 축하와 함께 응원,
소수는 왜 사서 고생하냐는 말과 함께 반대였고,
그리고 예상치 못한 스카웃제의를 해 주신 분이 한 분 계셨습니다.
현직장 사람들의 반응은 열외로 하고, 어떤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나 보면, 진짜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은 축하하며 응원했습니다. 다만 축하하고 응원해주는 사람 모두가 저와 가깝고 저를 잘 아는 사람인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저에게 적당히 무관심하고 그다지 가깝지 않은 사람들도 가벼이 축하하며 응원해 줍니다. 변화를 앞두고 불안한 저에겐 가벼운 축하와 응원도 큰 힘이 됩니다.
왜 사서 고생하냐며 결사반대하는 대표주자는 바로 가족입니다. 가장 내 편인 것 같은 가족은 언제나 내 편이 아닙니다. 반대이유는 그다지 합리적이지 않으므로 의지가 꺾이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가족의 반대는 타격감이 가장 큽니다.
그리고 영업이라면 학을 떼는 나의 지인들도 반대합니다. 영업을 버거워하는 가족을 가까이에서 봐 왔거나 사업 말아먹은 가족 구성원 때문에 고생했던 경험이 있는 지인들은 자신의 간접경험과 직접경험에 기반하여 반대를 합니다. 이들의 반대는 타격감은 크지 않지만 걱정과 불안은 크게 증폭시킵니다.
결사반대 집단이 축하응원 집단보다 저와 훨씬 친밀하고 저를 더 아끼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에 나를 구원하는 것은 언제나 사랑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한 계단을 오르려 하나 사랑은 오직 보호만을 목표로 합니다. 가고자 하는 방향이 다른 것입니다. 본질이 그러할 뿐인데 여전히 섭섭하고 슬프긴 합니다.
그리고 예상치 못했던 스카웃 제의.
지금에 와서 원래 계획을 번복하기에 늦어버렸지만 참 아까운 자리를 제의해 주신 교수님께 너무 감사했습니다. 퇴사할지 모른다고 우연한 기회에 지나가는 말로 한 마디 한 것을 잊지 않으신 것에 감동했습니다. 불안과 걱정으로 정서가 불안한 때라 누군가 내밀어 주는 손은 귀하디 귀합니다. 그 손 잡을 수는 없어도 왠지 내가 대단한 능력자 대우받는 것 같아 자신감이 생깁니다. 뭐든 잘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전에 어떤 강의에서 들은 적이 있는데, 우울증은 현재가 고통스럽고 힘들다 해서 무조건 생기는 게 아니라고 합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 없음. 그것이 우울증의 원인이라고 합니다. 현재가 견딜 수 없이 힘들더라도 미래는 나을거란 희망이 있으면 우울증이 생기지 않지만 현재의 고통은 수인한도 내인데도 이 상황이 나아지리란 희망이 보이지 않으면 우울증에 쉽게 걸린다고 합니다. 전문가가 아니라서 이 말이 맞는 말이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지난 7, 8월만 해도 당장 내일을 견딜 수 있을까 확신이 없었는데 새로운 도전에 활기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생각지 못한 새로운 기회를 만나게 되니, 어쩌면 다른 기회도 생길거란 기대도 됩니다.
내 자리에서 상상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일어나 앞으로 나가보면 어쩌면 세상은 내가 앉아서 상상한 것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에필로그 혹은 쿠키.....
반드시는 아니지만 공무원 집안에서 공무원 나고, 사업가 집안에서 사업가 나는 경향이 큽니다.
물론, 오랜 공직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자식에겐 자기사업을 권유하거나 모든 것을 본인이 책임져야하는 자영업을 하다보니 자식에겐 안정적인 삶을 권유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후자의 경우보다는 전자의 경우가 훨씬 빈번합니다. 어쨌든 충고란 것은 어떤 이의 경험의 폭을 넘지 못합니다. 그러니 충고 그 자체는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나는 무엇을 선택하고 싶고 무엇을 포기할 수 있는지부터 따져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맞는 충고를 참고하면 됩니다.
그래서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며 스스로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끊임없이 고민하는 게 중요합니다. 부지런히 움직이지 않으면 내 주변엔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만 남게 되고 딱 그만큼이 내 세상의 한계가 됩니다. 그 사람들이 부족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렇게 사는 방법밖에 모르다 생을 마감하면 억울할 것 같아서 말이지요.